[이두영의 도시 탐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순교성지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매력 있는 서울 데이트 장소’

2017-03-11     이두영 기자

[스포츠Q(큐) 이두영 기자]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이 200만명을 돌파하며, 그들의 사회 변화와 발전에 대한 동참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귀화한 독일인이 장관직에 오르는가 하면 한 필리핀 출신 여성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습니다. 헌법재판소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 파면이 결정되던 지난 10일에도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시위에 외국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스펙트럼이 한층 다양해졌고 외국인들도 거기에 한몫하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그러나 질서와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숙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와 관련한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회상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 변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양화진 성지)’으로 가 봅니다.

절두산 순교성지(잠두봉 유적)로도 유명합니다. 은근히 조용하고 분위기 있으며 한강 전망이 빼어난 서울 데이트 장소입니다.

양화대교 북단 교차로에 인접해 한강 조망이 뛰어난 이곳에는 구한말 이땅에 천주교와 개혁사상을 전파하다가 생을 다한 서양인들이 묻혀 있습니다.

현재 지도에서, 합정역에서 양화대교와 당산철교로 이어지는 일대를 보면 양화진 성지공원, 양화진 지하차도, 양화진 문화원, 양화 진흥홍보관 100주년 기념관, 한국기독교 선교기념관, 잠두봉 지하차도, 잠두봉 선착장 등의 지명이 눈에 띕니다.

이는 모두 1880년대에서 1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폐쇄적 정신과 천주교를 앞세운 서양세력이 충돌하며 빚은 사건들을 반추하게 하는 증거들입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합정역에서 내려, 한강 방향으로 넉넉잡아 10분 걸어가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한국, 미국, 영국, 독일, 덴마크, 러시아, 호주, 프랑스 등 15개국 선교사 417명의 유해가 묻혀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를 만든 분들도 한강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곳 잠두봉의 묘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자동차로 서울 강변북로 양화대교 부근을 지나다보면 한강을 향해 시커멓게 돌출한 지형이 눈에 띕니다. 양화나루 바로 위쪽에 자리한 이 봉우리는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형상을 닮아 잠두봉이라 합니다.

먼 옛날부터 양화진은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유명했답니다. 조선시대의 화가 정선이 그린 ‘양화진도’에도 합정동 양화나루의 수려한 풍경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한 선비가 어린 아이와 함께 나룻배를 기다리는 그림이지요.

양화진은 고려시대 이후 한강을 이용한 물건 운반과 군사적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금압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천주교도 8000여명이 학살이 일어난 이후 잠두봉은 잔혹한 살육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기득권층은 만인의 평등을 외치는 서양종교를 몹시 못마땅히 여겼고 많은 신도들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지요.

 그해 병인양요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함대 침략 사건이 발생했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간 프랑스 신자들이 일러바쳐서 함대가 밀고 들어온 것으로 판단하고 함대가 정박해 있던 양화진 잠두봉에서 신자들의 목을 벴습니다. 머리가 잘려나간 산이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은 그런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에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함께 순교박물관이 있습니다. 개화기 및 일제강점기에 이질적 정신과 사고가 충돌하며 빚어졌던 아픈 역사의 순간들을 각종 자료와 조형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두산 천주교 성지의 야외는 잘 가꿔진 정원입니다. 각종 나무와 꽃밭, 장독대, 조각품 등이 있으며, 서울 데이트 장소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큼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