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전원 직선제' 김혜숙 이대총장 선임 스토리
[스포츠Q(큐) 정성규 기자] 경찰에 끌려가는 제자들의 고통과 절규를 보면서 눈물을 참지 못했던 그 노교수. '최순실 국정농단' 조사를 위한 국회 청문회에서 경찰에게 진압 당하는 제자들의 영상을 보고는 끝내 눈물을 보였던 김혜숙(63)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당시 김혜숙 교수 앞줄에는 이같은 영상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봤던 최경희 전 이대 총장과 대조를 이뤘다.
마음속으로나마 제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자 했던 모습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그 김혜숙 교수가 이화여자대학교 제16대 신임 총장에 선임됐다.
26일 이화여대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16대 총장 결선투표에서 김혜숙 교수가 57.3%, 김은미 국제학과 교수가 42.7%의 득표율을 기록해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회에 최종 복수 후보로 추천됐다. 이날 이사회는 1위를 기록한 김혜숙 후보를 신임 총장으로 선임했다.
결선투표는 지난 22일 치른 사전투표와 24일 1차 투표 결과를 합산해 1, 2위를 차지한 김혜숙 교수와 김은미 교수를 대상으로 진행됐다. 합산 투표 결과 김 교수가 총 득표율 33.9%를, 김 교수가 17.5%의 표를 얻었으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가 진행됐다.
이번 총장 선거는 1886년 개교 이래 사상 처음으로 직선제로 치러졌다. 총 선거권자는 교원, 직원, 학생, 동창 등을 포함한 2만4859명으로 구성됐다. 투표 반영 비율 등에 따르면 선거권자 1명의 표 비중은 교수 1표·직원 0.567표·학생 0.00481표·동창 0.025표로 환산된다. 이로 볼 때 결선투표에서 김혜숙 교수는 학생 뿐 아니라 교수진의 지지도 상당히 얻은 것으로 풀이된다.
김 교수가 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정식 임명되면 이대 개교 이래 교수, 학생, 교직원 등 학교 전 구성원이 선출한 첫 '직선제 총장'이 된다. 이대 총장 선출은 1990년 교수들이 직접선거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모두 간선제로 치러졌다.
김혜숙 교수는 지난해 10월 최경희 전 총장 퇴진의 계기가 된 미래라이프대학(평생교육 단과대학) 사태 과정에서 교수 시위를 주도하면서 줄곧 학생들과 한배를 탔다. 이대생들은 '학위(學位) 장사'라고 반대하며 86일간이나 본관을 점거했다. 결국 최경희 전 총장이 경찰을 부르면서 경찰 1600여 명이 학내에 투입됐다.
김 교수는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200여 명과 함께 본관 앞에서 '비선실세'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 입학 특혜 의혹과 관련해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최경희 전 총장은 이 시위를 한 시간여 앞두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김혜숙 교수는 지난해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유라 입학 특혜 의혹'의 중심 인물로 꼽히는 최경희 전 총장과 김경숙 전 신산업융합대학장, 남궁곤 당시 입학처장 등과 함께 중계방송 화면에 잡히자 일부 누리꾼들은 온라인에서 김 교수를 ‘비리 교수’로 성급히 단정짓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은 앞다투어 SNS에 오해를 풀어달라는 호소의 글을 게재하며 김 교수를 응원했다.
한 학생은 “이화여대 청문회 보시는 분들께. 김혜숙·최원자 교수는 이화여대 학생들 시위를 지원하고 격려해주셨던 교수협의회의 증인"이라면서 "농성 과정에서 가장 많은 힘이 되어주었던 교수 사회의 양심이에요. 무차별한 공격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말씀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도 질의 도중 여러 제보 중 이화여대 학생의 문자를 소개하면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김 의원이 읽어준 문자 메시지는 "김혜숙 교수님은 정의구현을 위해 애써주셨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국민들께 오해받는 상황이니 학생들 마음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 이대생은 "부디 청문회에서 교수님 노고가 크다는 사실을 전달해달라. 우리 모두 가슴 아파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에 오해 확산이 잦아들었고 김 교수가 학생들이 학교 측과 대립하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동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자 누리꾼의 반응은 성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김혜숙 교수는 이화여대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중심에 서는 사태에 이르게 된 데 대해 "이화여대의 일원으로서 굉장히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이화여대가 엉망이라고 비춰져서는 안 되고, 권한과 책임을 가진 소수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월. 김 교수는 이대 본관 점거 농성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학생회장 구명을 위해 교수들의 서명을 모아 탄원서를 제출했다.
최 전 총장이 '정유라 사태'에 휘말려 사퇴한 뒤 이때부터 총장 직선제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학생와 교수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지난 1월 교수평의회가 이사회에 권고안을 보내 직선제를 제안하고, 이사회가 받아들이면서 직접선거로 치르게 됐다. 총장 직선제 개편 후 이사회가 '65세 연령제한' 원칙을 둬 임기 중 정년에 이르는 김 교수는 참여하지 못할 뻔했지만 이사회가 지난달 이 규정을 폐지함에 따라 이대총장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1972년 이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김혜숙 신임 총장은 긴급조치세대 운동권 출신이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7년 이대 철학과에 부임한 뒤 교수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2002년부터 5년 간 이대 교수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2014년부터 교협 공동회장을 지냈다.
이대총장 취임식은 오는 31일 창립 131주년 기념식에서 열릴 예정이며 임기는 2021년 2월까지다.
앞서 김혜숙 총장은 지난 22일 '이대 학보'와 인터뷰에서 "연구기반 강화, 거버넌스 구조 선진화, 행정 효율·합리화를 추진 할 것"이라며 "또한 연구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책임시수 조정, 교수 보직 감축, 연구년제 개선 등을 실시해야 한다. 국가재정사업을 담당하는 국책사업 총괄본부 설치, 각종 연구 다양성에 최적화된 시스템 구축 등이 필요하다"는 정견을 밝혔다.
김혜숙 총장은 '정유라 특혜' 파문으로 손상된 이대 이미지 회복에 힘을 쓰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우선 이화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점, 입학 과정에서 공정성과 교육 정의를 손상시킨 점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며 "이화가 이득이 아닌 인간을 위한 가치와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대학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