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2015] (6) '펜싱 바보' 박상영이 '노력형 천재'로 사는 법

'펜싱에 인생 걸겠다' 마음 먹은 후 하루 4시간씩 개인 훈련... '그랜드슬램'으로 이름 남기는 것이 꿈

2015-02-12     민기홍 기자

[300자 Tip!] ‘노력형 천재’는 아무도 못 이긴다. 특히 그것이 스포츠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땐 모두 아는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때인 중학교 3학년 시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펜싱이 내 인생’이라고 승부수를 던진 소년이 있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 새벽, 야간 운동을 자처한데다 꼼꼼히 훈련일지까지 썼던 그는 이제 세계 정상급 검객이 됐다. 태릉선수촌 개선관에서 인천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에페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박상영(20·한국체대)을 만났다.

[태릉=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이상민 기자] ‘펜싱 르네상스’다. 2012 런던 올림픽부터 2014 인천 아시안게임까지 연달아 ‘골든’ 퍼레이드를 펼치며 메이저 무대 최고의 효자 종목으로 거듭났다.

체육인들을 만나면 “타고난 것은 못 따라간다”고 입을 모은다. 종목마다 분명 천재가 있다. 여기에 남다른 노력이 더해지면 세계 최고가 된다. 펜싱에서는 박상영이 그런 케이스다. 그가 있어 정진선(화성시청), 박경두(해남군청·이상 31)가 은퇴하더라도 에페 계보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박상영은 경남 진주 제일중 3학년이던 2010년 전국대회 4관왕을 차지하며 유망주로 떠올랐다. 경남체고 시절에도 전국체육대회는 기본이고 나가는 대회마다 메달을 모조리 쓸어담으며 한국 펜싱의 대들보가 될 선두 주자로 각광받았다.

끝이 아니었다. 2013년 4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에페 우승자가 됐고 그해 9월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았다.

지난해 1월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시니어 데뷔전 그랑프리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8월 스위스 베른에서 개최된 그랑프리에서 또 정상에 올랐다. 아시안게임 에페 단체전에서도 형들과 함께 시상대 맨 위에 오르며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 운명처럼 다가온 펜싱, 인생을 걸다 

“물론 망설였죠. 펜싱이 뭔지도 몰랐어요. 근데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박상영은 중학교 1학년 때 검을 잡았다. 경남 진주중 펜싱부 화용득 감독의 권유였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펜싱은 ‘생애 처음으로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던 그는 결국 펜싱에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운동에 대한 편견이 있으셨고 걱정 많이 하셨죠. 학원도 빼먹고 펜싱하러 다녔거든요.”

근심으로 가득찬 부모를 납득시킨 건 다름 아닌 박상영의 ‘의지’였다. 오전, 오후 5시간에 걸친 정규 훈련을 하고도 스스로가 부족했다고 느낀 그는 오전 6시에 일어나 2시간씩 거울과 마주하며 스텝 훈련을, 오후 8시부터는 2시간씩 강변을 뛰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훈련일지도 거르지 않았다.

2년 후부터 펜싱계를 평정했다. 박상영은 “누구보다 운동량이 많다는 믿음이 생기니 자신감이 커지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국내 무대는 좁았다. 국제 무대도 석권했다. 차곡차곡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지난해 시니어 데뷔 무대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펜싱 선수가 아니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는 “펜싱 선수가 아닌 길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어딘가에서 배달하고 있을 것”이라고 웃었다.

◆ 도쿄까지 책임져야할 간판, 박상영 스스로가 생각하는 단점 

177cm. 결코 큰 키가 아니다. 팔 길이도 짧아 상대를 찌르기 불리하다. 하지만 박상영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는 “처음에는 신체 조건이 불리하다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도 않더라”며 “작은 것도 다 나름의 장점이 있다. 다리가 빠른데다 내 몸의 타깃이 작다보니 상대가 더 어렵게 느낀다”고 말했다. 에페의 공격 범위는 전신. 박상영은 상대가 찌를 수 있는 범위가 좁은 걸 장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위축되지 않는다. 조희제 남자 에페대표팀 감독은 “시니어 무대서도 겁을 먹는 것이 전혀 없다. 박상영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감”이라며 “내년 리우 올림픽은 물론이고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한국 펜싱을 이끌어갈 대표 주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 에페의 간판 정진선은 “선배들이 조언을 건넬 때마다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하고자 하는 자세도 일품”이라며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하다. 사고가 늘 열려 있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라고 후배를 치켜세웠다.

박상영은 이같은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그저 “아직도 멀었다”며 보완해야 할 점들을 나열할 뿐이다.

“아시안게임 전에는 불안감이 너무 커져서 불면증이 왔어요. 국내에서 하는 대회라 응원 관중도 많고 그렇게 큰 부담은 처음이었어요. 경기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순간에는 움직임이 뻣뻣해지면서 서둘러요. 또... 저는 열심히만 하려 하는데 대표팀 형들은 집중도가 달라요. 효율적으로 운동하시죠. 다들 자기만의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아직이고요.”

◆ 업그레이드 2015,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들

이제 국제 무대에서 박상영을 모르는 선수는 없다. 갑자기 툭 튀어나와 패기로 덤비던 신예의 성향이 차츰 읽힐 때가 됐다. 조 감독은 “박상영은 강호다. 빠른 발을 이용한 페인팅 공격 등 좋아하는 기술만 써서는 안될 때가 왔다”고 한 단계 성장을 주문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훈련에서는 완급조절과 움직임을 세밀하게 가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유럽 선수들의 타고난 골격과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없기에 템포를 조율해가며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다. 지난 시즌 스피드 일변도의 전략에 변화를 줘 새 패턴을 구축할 참이다.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한 살 어린 손태진(울산고)과 오상욱(송촌고)의 합류로 ‘태릉 막내’ 타이틀도 벗어던졌다. 어느덧 16개월째 선수촌에서 생활중인 박상영은 “또래가 없어서 형들한테 져도 분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며 “비로소 자극이 된다. 서로 발전하니까 좋다”고 이를 악물었다.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그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개인전에 나서지 못했다. 박상영은 “기용되지 않은 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며 “요즘에는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리우에서 메달을 따고 마스크를 던지는 모습을 떠올린다”고 밝혔다.

펜싱 종목 중 에페는 특히 이변이 많다. 공격 우선권이 없고 먼저 찌르는 사람이 득점을 하기 때문이다. 박상영은 “변수가 너무 많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름도 없는 선수가 막 치고 올라온다”며 “현재 6위인 세계랭킹 유지에 중점을 두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목표는 운동 선수로서 누구나 갖는 그랜드슬램.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로 4분의 1을 달성한 그는 “그렇게 된다면 은퇴하더라도 박상영이란 이름을 기억해주시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취재 후기] 인터뷰 내내 웃음꽃이 피었다. 다시 태어나도 펜싱 선수를 하겠냐는 질문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네”라는 답이 돌아왔다. 쉬는 날 친구들과 만날 때도 몸에 안 좋을까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행여 경기력에 지장이 생길까 아직은 여자친구를 만날 때가 아닌 것 같단다. 박상영은 "태릉에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고 귀띔한다. 오직 운동밖에 모르는 이 성실한 청년 덕에 한국 펜싱의 르네상스 기운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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