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나는 '광대'로소이다 [인터뷰Q]
[스포츠Q(큐) 나혜인 기자] "이 역할은 황정민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황정민. 이 세 글자만 떠올려도 얼마나 많은 인물이 무수히 머릿속을 스쳐 가는가. 무뚝뚝한 청춘 강수나 어수룩한 노총각 석중, "브라더!"를 외치게 만드는 정청, 존재만으로 눈물짓게 만드는 아버지 덕수, 9번 방의 영감님 재욱, 극악무도한 박성배와 전요환, 실존 인물을 빼닮은 전두광 등 기억에 남는 인물만 줄줄 읊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그중 베테랑 형사 서도철은 시그니처 음악이 자동재생될 정도로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황정민이 아닌 이들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른 배우로 대체 가능하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 수많은 갈래로 뻗어나가 '황정민'이라는 상징성을 만들었다.
2015년 개봉해 1341만 관객을 동원, 역대 한국영화 흥행 톱5를 기록 중인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속편으로 돌아왔다. '베테랑2'는 류승완 감독의 첫 프랜차이즈인 동시에 황정민의 첫 시리즈 영화이기도 하다. 1편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둔 덕에 속편 제작을 진즉 결정했으나 예상보다 기다림이 길었다. 그 사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발발하고 영화시장이 변화하면서 성수기였던 추석 연휴는 썰렁해졌다. 올 추석 연휴를 겨냥해 개봉하는 대작은 '베테랑2'가 유일. 감독과 배우들이 영화인으로서 가지는 안타까움은 컸지만, '베테랑2'는 기존 관객의 기대와 나 홀로 출격을 업고 닷새 만에 누적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 '아버지' 서도철, '아버지' 황정민
지금이야 '베테랑'이 얼마나 대단한 흥행작인가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황정민 나름의 무력감이 있었다. '신세계' 촬영이 한창이던 당시 그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을 선보이지 못했다는 부담을 느끼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그러던 중 류승완 감독이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좋아하는 걸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한마디가 서도철의 탄생 신호탄이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된 서도철은 "내 주변에 이런 형이나 삼촌이 있으면 든든하고 근사하겠다"는 황정민의 작은 소원이 담겼다. 동시에 형사라는 직업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길 바랐다. 황정민은 "영화 중에 형사 이야기가 유독 많지 않나. 그런데 형사 캐릭터라고 하면 '범죄도시' 마석도, '공공의 적' 강철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우영민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런 것처럼 서도철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1편과 2편의 공백은 9년, 다시 돌아온 서도철 형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형사이기 이전에 고등학생 아들을 둔 수험생 학부모가 됐고, 가장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아버지가 됐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겪게 된 것. 정의를 상징하던 단편적인 인물은 현실에 붙어 있는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그중 류승완 감독과 황정민이 특별히 여긴 서도철의 모습은 '자기 잘못을 사과하는 어른'이었다.
황정민은 "1편은 범죄를 저지른 이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게 사회의 기본처럼 비친다. 2편은 그보다 복잡하다. 정의를 넘어 '사과하는 용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들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기본대로 정도 있게 돌아가지 않을까라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베테랑2'는 선과 악, 이분법적인 정의가 아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실된 고민과 질문이 그려진다. 그렇기에 1편과 다른 톤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흥행 공식을 답습하지 않고 의미 있는 도전장을 내민 류승완 감독을 향해 존경을 표현한 황정민은 "이미 '부당거래'라는 작품으로 한 차례 호흡해 봤기 때문에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부당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돌다리를 만들어 놓고 왜 힘들게 다시 돌을 놓으려고 하냐'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고민들을 거쳤기 때문일까. 그는 "1편에서는 못 느꼈는데 2편을 보는데 문득 서도철의 욕설이 불편하게 들리더라"라고 털어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영화 속 형사의 말 끝에는 항상 욕설이 따라붙었다. 일련의 공식처럼 굳어진 연출은 종종 우려를 불러오기도 했다. 황정민은 "굳이 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왜 저런 대사를 할까 싶었다. 촬영할 때는 몰랐다"며 "앞으로는 욕설 대사를 줄여봐야 할 것 같다"고 다짐했다.
◆ '예술가'이자 '광대', 배우 황정민
영화 밥을 먹은지 어언 30년, 장편 데뷔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역대 국내 박스오피스 흥행 순위 톱10 중 3개가 황정민의 주연작일 정도로 충무로 굵직한 작품에는 언제나 황정민이 있었다. 그는 청춘이자 아버지였고, 선악 구분 없이 동시대의 '대중'을 상징하는 배우였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유효했다.
황정민이 배우로서 바라는 바는 누군가 자녀에게 '황정민'을 소개할 때 "나 젊었을 때 이 배우가 정말 좋았다"고 회상하는 것, 다음 세대가 오더라도 이전 세대가 기억하고 곱씹는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 바람이 황정민의 원동력이었다.
"저는 직업이 배우인 사람으로서 광대인 저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뿐이에요. 작품 하나를 두고 관객과 소통하고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시대 불문, 관객이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형'이기도. 최근 그의 필모그래피 속 모습을 음절마다 편집해 인기 음원으로 제작한 뮤직비디오가 인기를 끄는가 하면, 웹예능 '핑계고', tvN '언니네 산지직송'에서 보여준 삼촌 같은 소탈한 모습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데뷔 초기 조승우, 지진희 등과 함께한 우정여행 사진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꾸준히 회자되다 MZ세대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에 "바보 셋이 쪼들리는 상황에서 여행을 간 건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각자 자리를 잡다 보니 힙하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나"라는 너스레를 떤 황정민은 "나는 배우일 때와 아닐 때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아닐 때는 그냥 동네 백수 아저씨처럼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다. 어린 친구들이 저를 올드한 배우가 아닌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배우로 봐주니까 너무 고맙다. 젊은 친구들과 대화하기 편해졌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황정민 트렌드'에는 사람 황정민에게 느끼는 이유 모를 막역함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이 잦은 배우가 아님에도 사람 황정민을 향한 애정이 유지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 애플리케이션(앱) 없는 여행 예능 '풍향고'를 론칭하게 된 사연이 크게 주목받은 바탕에도 그를 향한 애정과 호기심이 있었다. '풍향고'는 황정민이 '핑계고' 출연 당시 뱉은 말실수가 여행 예능으로 확장된 기획으로 유재석, 황정민 등이 출연한다. "'풍향고'는 갑니다!"라고 선언한 황정민은 "당장 젊은 친구들의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앱 없이 떠나는 여행이라 가자마자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간다"고 확언했다.
'핑계고' 활약과 '풍향고' 론칭 덕에 지난해 열린 제1회 핑계고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배우 이동욱에 이어 2회 대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다. '핑계고'는 대한민국 대표 MC 유재석이 이끄는 프로그램으로 웹예능 중 가장 큰 파급력을 자랑한다. 1회 시상식이 조회수 1000만회를 훌쩍 넘기며 대성황한 만큼 다음 대상 후보를 향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황정민은 "대상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기대는 안 하는데 대상을 준다면 시상식은 가야 하지 않겠나"라는 은근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스스로 '광대'라고 표현한 것답게 관객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 스스럼없었다. 특히 이번 추석 연휴 동안 이어지는 '베테랑2' 홍보 일정 참석에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서울의 봄' 홍보 당시 232회 진행된 무대인사에 모두 참석한 정우성을 언급하며 "저는 그때 '호프'를 찍고 있어서 전부 참석하지 못했다. 우성이가 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다. '베테랑2' 무대인사는 우성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려고 한다. 다음 작품이 없는 틈을 타 쉬면서 편안하게 즐기려고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