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민, 이 세상 모든 석류에게 [인터뷰Q]
[스포츠Q(큐) 나혜인 기자] "네가 좋아하는 걸로 가득 채워진 너의 삶을 응원해."
'K-장녀'라는 것이 보통 그렇다. 여성으로서의 구속과 맏이라는 막중한 책임감, 비틀린 균형 속에 숨이 턱 막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 과거에는 밭으로 간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업어 키운 앳된 보모가 있었고, 가족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미싱 공장으로 향하는 어린 노동자가 있었다. 이러한 기조는 한국인의 삶에 뿌리 깊게 박혀 은근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압박이 뭍으로 올라와 '너도 그래? 나도 그래!'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K-장녀'라는 키워드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가.
지난 6일 인기리에 종영한 tvN 토일드라마 '엄마친구아들'(연출 유제원, 극본 신하은)은 정소민, 정해인 두 주연의 로맨틱코미디 케미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와 동시에 정소민이 연기한 배석류가 'K-장녀'의 공감을 사면서 2049 여성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그중 탄탄한 커리어를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배석류가 자신의 꿈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왜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지도 못 해?"라고 외치는 장면은 깊은 공감을 얻었다.
실제 장녀인 정소민 또한 배석류에게 많이 공감했다고. 정소민은 지난 8일 스포츠Q와 진행한 '엄마친구아들' 종영 인터뷰에서 "석류는 많은 책임감을 어깨에 짊어진 상태로 쉼 없이 달려왔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몸도 마음도 아팠다"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가질 수밖에 되는 장녀만의 책임감이 있다. 그 책임감이 석류를 자유롭게 못 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1화에서 석류가 엄마에게 설움을 토하며 '너무 힘들어서 돌아왔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라고 하는 장면, 8화에서 '왜 나한테만 기준이 엄격해?'라고 쏟아내는 장면은 대본을 보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엄마보다는 관대하다고 느꼈던 아빠마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네가 진짜 잘하는 줄 알지?'라는 비수를 꽂을 때는 울컥하는 감정이 크게 올라오더라고요."
정소민은 1남 1녀 중 장녀로 남동생에 비해 엄격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저만 통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해만 지면 전화가 왔다"고 회상한 정소민은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때는 동생과 다르다는 것이 억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어머니와 함께 본방을 시청했다는 정소민은 "매회 방송이 끝나면 엄마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석류의 숨겨진 아픔이 드러났던 회차는 2~3시간 동안 이야기했다"며 "(어머니께서) 석류와 미숙(박지영 분)에게 이입해서 봤다. 딸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엄마의 마음에 이입해 석류가 혼자 아파했던 시간을 상상하고 마음 아파했다. 타국에서 많은 것을 이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그러기까지 얼마나 혼자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견뎠을 것이며 애를 쓰고 고군분투했을지 상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더라"라고 말했다.
"상황이 다르지만, 저에게도 석류를 대입하게 되나 보더라고요. 물리적으로 먼 거리는 아니더라도 본인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일하는 딸을 보면서 늘 안쓰러웠던 것 같아요. 저도 일거수일투족 털어놓는 딸이 아니라서 혼자 끙끙거릴까 봐 부모로서 걱정하는 거죠. 그래서 드라마를 보며 더 울컥하셨던 것 같아요."
부모의 걱정만큼은 아니지만, 정소민 역시 연기 외길을 걸어오며 스스로를 돌보지 못 했던 번아웃 순간이 있었다. 그는 "다행히 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쉬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내가 너무 소진되기만 하겠다는 것을 20대 후반부터 조금씩 느꼈고,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새로운 방향성을 잡아놔야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뒤로는 저를 많이 들여다보고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생각한다고 해서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리마인드하다 보면 점점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 않나. 지금은 처음 그 생각을 했을 때보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 있다"고 밝혔다.
배석류는 혜릉동으로 돌아와 최승효(정해인 분), 정모음(김지은 분) 등의 든든한 보살핌 속에 자기 자신을 찾아나간다. 정소민은 "석류가 뿌리를 두고 있는 혜릉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꿈을 찾아나가는 마음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석류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혜릉동으로 돌아와 사람들 사이에서 정서적인 안정을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스스로를 온전히 집중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적 여유가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특히 최승효는 배석류의 아픔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배석류가 행복했던 과거의 편린을 하나하나 모아 그의 주변에 둘러준다. 좋은 연인이기 이전에 누구나 한 명쯤 갖고 싶은 든든한 친구인 것. 정소민은 승효를 '소울메이트'라고 칭하며 "승효는 석류에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이다. 진짜 가족에게 꺼내지 못 하는 말들, 내어 보이지 못 하는 마음들도 그의 앞에서는 밑바닥까지 서슴없이 내어 보여 줄 수 있다. 나의 수치스러운 부분, 미성숙한 감정도 편안하게 터놓을 수 있는 관계다. 그런 관계는 너무 귀하지 않나. 나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석류가 부럽기도 했다"고 이야기했다.
극 말미 배석류가 최승효에게 역프러포즈를 하며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은 정소민의 마음이 담겼다. 그는 "원래는 뽀뽀하는 것까지만 대본에 있었다. 승효를 향한 고마운 마음을 담고 싶어서 대사를 추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고마워',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 이런 대사를 하루 이틀 고민해서 갔다. 음식으로 프러포즈하는 것이 석류답고 귀여웠지만 거기에 진정성 있는 말 한마디가 더해지면 석류의 감정이 풍부하게 전달될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엄마친구아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정소민은 남은 올해를 재정비 기간으로 보낼 계획이다. 정소민은 "특별히 계획한 것은 없다. 내가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작품을 다시 만나기까지 잠시 숨을 돌리고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가는 작품을 만나는 것이지만 텀이 너무 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기억에 남는 시청자의 이야기도 전했다. 정소민은 "일본 분이셨는데, 석류와 비슷하게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더라. 석류처럼 크게 아팠던 것은 아니지만 살도 많이 빠지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그 분께서 드라마를 보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고 석류를 보면서 '그 당시에 나도 많이 울고 싶었구나'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고 했다. 그 말이 제게 큰 위로가 됐다. 또 해당 글 밑으로 다양한 국적의 시청자들이 응원 댓글을 단 것을 봤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광경이 너무 따뜻하고 뭉클했다"고 말하며 드라마가 갖는 선한 영향력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