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박혜나에 대한 초록 [인터뷰Q]

2024-12-16     나혜인 기자

[스포츠Q(큐) 나혜인 기자] "네 안에 엘파바가 있구나."

음악감독 데이비드 영은 지난 2013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 한국 초연 오디션장에 나타난 뮤지컬 배우 박혜나(42)에게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선한 초록마녀 엘파바를 발견했다. 당시 박혜나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였다. 일찍이 대극장 주연으로 자리 잡은 옥주현, 김선영 곁에 박혜나라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며 업계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박혜나는 '신인'이 아니었다. 대학로에서 쌓은 10여 년의 경력이 '대극장' 앞에서 터부시됐다. 동료 배우들이 대신해 "10년 경력을 가진 신인이 어디 있냐"며 억울함을 내비칠 정도였다. 지금보다 소극장과 대극장의 경계가 뚜렷했던 시절, 유리천장을 깨고 타이틀롤을 거머쥔 배우가 '신예'로 축소된 점은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박혜나는 더욱 열심히 달렸다. 말 그대로 '달렸다'. 1년간 이어진 초연 기간 동안 공연이 없는 날에도 석촌 호수 수 바퀴를 돌았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에는 김밥 다섯 알을 먹고 샤롯데씨어터 연습실로 향했다. 연습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공연을 보고 퇴장하는 관객들 사이를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10년차 신예' 박혜나의 일상이었다.

"잘하고 싶었어요. 저는 대학로에서 왔으니까요."

박혜나.

"소극장에도 좋은 배우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발판이 되겠다"는 책임감이 그날의 박혜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초연 개막 후 단 3주 만에 엘파바와 박혜나를 조합한 '박파바'가 관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신예' 타이틀은 박혜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찬 '박파바'로 단숨에 교체됐다.

그런 박혜나가 최근 출산을 하며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뮤지컬 팬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아팠다. 유리천장을 깨고 한국 뮤지컬 정상에 오른 이마저 어려움을 체감하는 것이 출산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박혜나가 고민에 빠진 순간, 정말 마법처럼 '위키드'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위키드' 영화 더빙 제안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영화는 상업시장이다 보니 가수에게 제안이 갈 거라고 생각했죠."

박혜나는 유니버설 픽쳐스가 점 찍은 엘파바 성우 1순위였다. '위키드' 한국 공연의 성공 주역인 박혜나와 손을 잡고 무대와 영화를 넘나드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 것. 유니버설 픽쳐스 측은 출산을 앞두고 있어 평소 기량을 완전히 뽐내지 못한 테스트곡에도 찬사를 보내며 '위키드' 박혜나의 복귀를 환영했다. 출산 이후 더빙 과정은 재녹음, 수정녹음 한번 없을 만큼 완벽하게 흘러갔다.

박혜나.

'위키드' 초연 캐스트 박혜나와 정선아가 한국어 더빙을 맡은 영화는 지난달 20일 개봉해 더빙 N차 관람을 업고 누적 관객 수 165만명을 달성했다. 개봉 4주차에 접어들며 '모아나2', '소방관', '대가족', '1승' 등 쟁쟁한 경쟁작이 개봉했지만 꿋꿋하게 박스오피스 톱3를 지키고 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더빙으로 '회전문을 돈다'(공연을 여러 번 관람한다는 의미)는 말까지 나왔다. 실사 뮤지컬 영화가 더빙으로 사랑받는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박혜나는 "남편(김찬호)은 하는 작품마다 OST가 발매돼서 집에 장식돼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 기록된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더빙을 통해 그야말로 박제가 되지 않았나. 아이에게도 '이거 엄마 목소리야'라고 할 수 있어 뿌듯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박혜나를 더욱 기쁘게 만든 것은 1년의 공백에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켜준 팬들이었다. 더빙 캐스트 무대인사를 통해 팬들과 재회한 그는 "1년을 쉬었는데 뮤지컬 객석에서 봤던 관객이 영화관에 그대로 앉아 있더라. 한국 관객들은 코로나로 인해 브로드웨이가 문을 닫을 때도 국내 공연이 계속될 수 있도록 지켜준 분들"이라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위키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에요. 힘들 때, 위기일 때마다 구원투수처럼 나타나서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작품이죠. 더빙하면서도 무대 위에서 느꼈던 향기, 몸의 감각들을 되새겨요. 배우로서 감사함을 느끼고 이런 기회가 왔으니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죠. 젊었을 때는 앞만 보면서 걸어왔는데 이제는 나이도 먹었고, 이 감사함을 발판 삼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박혜나.

"오디션은 연습 기회"라고 되뇌던 10년 전 박혜나는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앞뒀다. 배우 박혜나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관객과 선배 박혜나를 존경한다고 고백하는 후배들이 그의 곁에 함께했다. 인생 선배로서, 베테랑 뮤지컬 배우로서 조언 한마디를 부탁하자 박혜나는 "혼란스러울 때, 결정이 복잡할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땐 자기 안을 들여다봐라. 그 안에 답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마음의 소리를 듣기 어렵겠지만 잘 듣고 따라가면 좋은 결과를 얻을 거다. 흔들리지 않는 심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이미 저마다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어쩌면 이 대답이 10년 전 '위키드' 음악감독이 발견한 박혜나 내면의 엘파바가 아닐까.

'위키드' 엘파바로 시작해 '잃어버린 얼굴 1895' 명성황후, '하데스타운' 페르세포네, '이프덴' 엘리자베스, '식스 더 뮤지컬' 제인 시모어와 더불어 '겨울왕국' 엘사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박혜나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2013년의 박혜나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아이가 커서 엄마가 엘사, 엘파바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요?"라고 물으니 그는 "집에선 자장가만 불러도 아이가 손으로 제 입을 막아요. 뱃속에 있을 때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줬나 봐요.(웃음) 저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아이가 엘사 옷을 입을 날을 기대하게 되더라고요"라고 답하며 아이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