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는 오직 나 하나뿐" 피겨선수 되기 위한 아홉번의 싸움

피겨 승급심사, 필수요소 실패하면 재수·삼수…경기보다 더한 긴장감

2014-04-22     박상현 기자

[300자 Tip!] 피겨스케이팅 시즌이 끝난지 벌써 2개월이 지나갔다. 겨울 내내 스포츠 뉴스에 오르내렸던 김연아(24·올댓스포츠), 김해진(17·과천고), 박소연(17·신목고) 등의 이름은 어느새 쏙 들어갔다. 하지만 '피겨 퀸' 김연아의 은퇴에도 피겨열풍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피겨 유망주들이 '포스트 김연아'를 꿈꾸며 다음을 시즌을 꿈꾸고 있다. 피겨스케이팅 승급 심사를 받으며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현장에서 따라잡았다. 피겨에서 높은 급수는 선수들의 '스펙'인데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낙방하기 때문에 경기보다 더한 긴장감이 흐른다.

[태릉=스포츠Q 글 박상현 · 사진 최대성 기자] 화창한 일요일인 지난 20일, 태릉선수촌 빙상장에는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적지 않은 선수와 학부모, 코치들이 총 집결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이 1년에 세차례 시행하는 승급심사를 받기 위한 선수들이다.

취업준비생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토플, 토익점수를 높이듯 피겨선수에게 높은 등급은 바로 '스펙'이다.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아야만 대표 선수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한단계 낮은 등급을 받아도 대표 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가장 높은 등급인 8급 선수가 많아져 8급이 아니면 명함을 내밀지 못하게 됐다.

피겨 급수는 초급과 1급부터 시작해 8급까지 9단계로 나뉜다. 이 가운데 초급부터 4급까지는 각 지역별 연맹에서 승급 심사를 진행하고 5급부터 8급까지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주관한다. 그냥 보면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반씩 지역 연맹과 대한빙상경기연맹이 나눈 것 같지만 이 기준엔 나름 이유가 있다.

◆ 초급 따야 선수 등록, 제대로 된 선수 대접은 5급부터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승급 규정에는 초급을 획득하면 선수 등록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초급을 따게 되면 연맹의 관리를 받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급은 엣지 스케이팅과 전진 스트로크, 전진 크로스오버, 후진 크로스오버 등의 필수요소를 통과하면 받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얼음을 탈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것이다. 취미로 하면 6개월이면 충분하고 성실히 레슨만 받으면 대개 통과한다는 것이 피겨 전문가들의 얘기다.

점프를 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1급부터다. 스텝 시험과 함께 1분의 프리 스케이팅을 통해 토룹과 살코 점프, 왈츠 점프 등을 심사한다. 또 스핀 연기도 수행해야 한다. 그래도 초급에서 1급까지하기까지 취미로 할 경우 3개월에서 6개월이면 패스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블 점프를 뛰어야 하는 3급부터 '좀 피겨를 배웠구나'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3급에서는 더블 살코와 더블 토룹, 더블 룹, 싱글 이상과 더블을 합친 콤비네이션 점프, 5회전 이상의 스핀 등을 심사한다. 이 때부터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3급과 4급까지도 지역 연맹에서 승급 심사를 진행하지만 5급부터는 대한빙상경기연맹에서 관리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4급과 5급의 차이를 피겨 전문가들은 바둑이나 태권도, 유도 등에서 말하는 급과 단만큼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급에서 단으로 넘어가면 전문가 또는 전문 선수로 인정받듯 4급과 5급의 차이는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로 들어서느냐 아니냐 하는 갈림길이 된다는 것이다.

4급과 5급의 차이는 별반 다를바 없어 보인다. 3급에서 뛰는 살코, 토룹, 룹에 플립과 러츠까지 5종 점프를 더블로 뛸 수 있는 것이 4급이다. 반면 5급은 더블 악셀을 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5종 점프와 악셀은 반 바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두 바퀴 반을 뛸 수 있느냐 없느냐다. 이 반 바퀴의 차이 때문에 4급에서 좌절하느냐, 5급으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선수로 들어서느냐가 가려진다.

5급부터 빙상연맹에서 승급 시험을 주관한다는 것은 피겨 선수들과 학부모, 코치들 사이에서 '진짜 선수 대접'을 해준다는 의미로 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5급 준비, 마음가짐부터 달라진다

최서현(14·무룡중)도 5급 시험을 보기 위해 울산에서 상경했다. 전날 밤에 떠나 오전 3시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최서현은 장시간 여행의 피곤을 느낄 틈도 없이 무척 긴장해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해 4년만에 5급 시험을 보게 된 최서현은 준비하면서 마음가짐을 새로 다지게 됐다고 털어놨다.

"취미로 할 때는 아무 생각없이 놀면서 했는데 5급을 준비한다는 것은 선수를 본격적으로 한다는 의미라서 음식 조절도 하게 되고 다른 운동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 3시간씩 훈련을 하는데 공부와 병행하느라 힘들었어요."

울산에는 피겨 훈련이 가능한 빙상장이 없기 때문에 부산으로 다녀야 한다. 동래아이스링크나 북구아이스링크, 김해아이스링크까지 부산에 있는 빙상장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빙상장이 좁은 곳이 많은데다 좀 넓어도 빙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훈련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놓는다.

게다가 최서현은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게을리 할 수 없는 환경이다. 울산에는 피겨선수를 특기생으로 받아주는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수업을 모두 들으면서 부산까지 훈련을 받으러 가는 생활이 계속된 것이다. 그렇기에 5급 통과는 본격적인 선수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일상생활이 확 바뀌는 의미다.

"5급을 따게 되면 이제 더이상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기 힘들 것 같아요. 선수로서 훈련을 더 해야 하기 때문에 특기생으로 받아주는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죠. 특기생은 훈련하는데 있어 학교에서 배려해주니까요."

그래도 최서현은 공부 욕심도 부리고 싶다고 말한다. 반에서 3등 정도 한다는 그는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마음껏 피겨 훈련을 받으면서도 공부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각오로 가득했다.

최서현은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인 더블 악셀에서 실수했다. 필수 요소 심사는 실패할 경우 한번씩 더 기회를 준다. 다행히 최서현은 두번째 시도에서 더블 악셀을 깔끔하게 성공했다. 이어 카운터 스텝도 안정감있게 밟았다. 필수 요소 시험을 본 39명 가운데 프리스케이팅 시험을 보는 18명 안에 들었다. 그리고 필수 요소 시험을 면제 받은 6명의 선수까지 포함해 24명이 출전한 프리스케이팅에서도 무난하게 연기를 펼쳐 합격했다.

김나영 코치는 "일반 더블 점프을 뛸 줄 알 때부터 더블 악셀을 마스터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조금 더 힘을 주고 뛰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수 밖에 없다"며 "취미로 하는 선수는 물론이고 전문 선수를 목표로 하는 스케이터들도 끝내 더블 악셀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초급부터 4급까지는 쉽게 올지 몰라도 5급부터 8급까지 올라가는 것은 하나하나 전부 힘들다"고 말했다.

◆ 선수나 부모님이나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승급 심사를 보면서 긴장하는 것은 선수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다. 그 긴장감은 대학수학능력시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서현과 함께 상경한 어머니 이혜아 씨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합격 통지를 받고 급수증을 받긴 했지만 딸의 점프와 연기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이혜아 씨는 "학교 수업을 모두 들으면서 훈련을 하다보니 체력적인 면이 많이 부치는 것 같았다. 특히 더블 악셀을 한번 뛰면 많이 힘들어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첫 더블 악셀을 실패한 딸의 모습에 무척 안쓰러워하는 모습이었다.

5급 시험을 보러온 박소연(14·목일중)의 어머니인 김희정 씨도 관중석에서 딸의 점프 하나하나를 집중하면서 성공할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김희정 씨는 "아무래도 5급이 갖는 의미는 선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5급을 따야 비로소 선수로 인정해준다"며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목동아이스링크에서 함께 훈련하는 대표 선수 박소연과 동명이인이라 '큰 소연', '작은 소연'으로 불린다는 김희정 씨는 "딸도 박소연 선수를 롤모델로 삼고 점프를 깨끗하게 뛰고 싶어 한다.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해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국가대표 출신 김나영(24) 안양피겨클럽 코치는 "사실 일반 경기보다 승급 심사가 더 어렵다. 일반 경기에서 점프를 실수하면 점수가 깎이고 성적이 떨어지면 끝이다. 하지만 승급 심사에서 점프를 실수하면 이는 곧 낙방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성적으로 등수를 나누는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로 당락을 결정하는 차이라는 얘기다.

◆ 실수는 곧 불합격, 경기보다 더한 긴장감

실수 하나에 합격과 불합격이 나뉘다 보니 선수들은 늘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빙상연맹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있었던 승급 심사를 세 차례로 늘려 선수들의 부담을 덜어줬지만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피겨를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해왔다는 박윤조(18·늘푸른고)도 이번에 5급에 응시했다. 하지만 점프에서 실수하면서 24명이 치르는 프리스케이팅 시험을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도전하겠다며 눈을 반짝인다.

"이번에 고3이라 사실 나갈지 말지 고민도 했었지만 피겨를 시작한 이후로 단 한번도 쉰 적이 없었어요. 5급을 따지 못하고 그만 두는 건 아쉽죠. 또 5급을 따놓으면 나중에 직업을 선택할 때 더 수월할 것 같아서 학교 다니면서 꾸준히 연습했어요. 결과는 아쉽지만 포기하진 않을래요. 2차 시험은 수능 준비 때문에 못보겠지만 3차 승급심사도 다시 도전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할 생각이예요."

승급심사의 벽은 국내 선수권에서 좋은 기록을 남기는 선수도 예외가 아니다.

김해진, 박소연과 함께 피겨의 유망주로 꼽혔던 조경아(17·과천고)는 아직까지 6급이다. 김해진과 박소연은 일찌감치 8급에 올라 대표 선수로 활약하고 있지만 조경아는 7급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실력과 발전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김해진, 박소연 등과 함께 올댓스포츠의 관리를 받으며 훈련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필수요소 시험을 일찌감치 합격해 프리스케이팅만 심사받은 조경아는 다시 한번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점프를 꼭 뛰어야 한다는 긴장감에 더 위축된 것이다. 끝내 제대로 된 트리플 점프를 뛰지 못한채 7급 합격을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6급과 7급의 차이도 엄청나다. 세계 대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시니어와 주니어를 나누지만 국내 대회에서는 급수가 그 기준이 된다. 국내 선수권을 치를 때 7급과 8급 선수들은 시니어 부문에 출전하지만 5급과 6급은 주니어에 출전하게 된다. 세계 대회에서 주니어 또는 노비스 부문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국내 대회에서는 시니어에서 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대로 조경아는 이미 나이로는 시니어가 됐지만 국내 대회에서는 여전히 주니어다. 조경아 말고도 아직까지 7급을 따지 못한 대학생 선수도 국내에서는 주니어다.

◆ 승급심사의 마지막 8급, 통과하면 '졸업'

7급을 합격하고 나면 마지막 관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바로 승급심사의 마지막인 8급이다. 8급을 따는 것은 곧 졸업의 의미다. 긴장되는 승급심사를 더이상 보지 않아도 되고 이제 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자기자신을 연마하는 것만 남기 때문이다.

최하연(13·평촌중)도 8급을 보기 위해 태릉빙상장을 찾았다. 8급 시험에 응시한 7명의 선수 가운데 두번째로 어린 최하연은 "승급심사는 급수에 관계없이 언제나 떨리고 긴장된다"며 "지난번 시험에도 트리플 러츠가 제대로 되지 않아 떨어졌다. 이번에는 꼭 러츠를 잘 뛰어 통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8급 시험을 붙으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냐고 묻자 최하연은 "아무 생각없이 일단 놀러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만큼 피겨 선수에게 얼마나 승급 심사라는 것이 긴장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쉽게도 최하연은 필수요소에는 합격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는 떨어졌다. 필수요소를 붙고 나면 앞으로는 프리 스케이팅 시험만 보면 된다.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한쪽에서는 합격자 명단을 보고 기뻐하는 선수도 있었다. 선수의 어머니에게 "이제 졸업이네"라며 축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승급심사에서 해방됐다는 의미다.

◆ 사춘기·성장 적응 잘해야 선수로 성장할 수 있어

5급부터 8급 시험 응시자 가운데는 어린 선수도 있지만 나이가 적지 않은 선수도 많았다. 대학생 선수 가운데에서도 6급에 응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날 8급 응시자 가운데 최연소 선수가 전세희(12·풍천초)라는 점을 생각할 때 꽤 적지 않은 격차다. 전세희는 이날 8급에 합격해 '졸업'했다.

이처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개개인의 사정 때문이다. 취미로 하다가 늦게 선수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선수 입문이 늦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초급에서 5급을 딸 때까지 4년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초등학생으로 8급을 따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1학년에는 피겨에 입문해야 가능하다.

또 다른 차이는 바로 사춘기와 성장통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면 승급 심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갑자기 키가 쑥 커버리면 점프의 질이 나빠져 승급 심사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부상도 변수다.

김나영 코치는 "더블 악셀을 뛸 줄 알고 나서도 트리플 하나를 더 완성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더블 악셀을 뛰면서 함께 트리플까지 연습한다. 일단 트리플 점프를 하나 완성해놓으면 나머지 점프도 좀 더 수월하게 익힐 수 있다"며 "하지만 밖을 보지 못하고 빙상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춘기를 잘 보내는 것 못지 않게 다치지 않고 갑작스러운 성장이 이뤄지기 전에 점프를 완성해놓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가 선수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밝혔다.

[취재후기] 피겨 팬들은 오직 화려한 연기와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들의 경기 모습만 본다. 물 위를 떠다니는 우아한 백조의 모습만 보는 격이다.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다니기 위해 자신의 발을 수없이 움직이듯 선수가 되기 위한 과정인 승급심사는 일반 경기보다 더욱 치열하다. 게다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더욱 긴장감이 흐른다. 그리고 점프 하나하나에 희비가 엇갈린다. 승급심사에 합격한 선수들은 더 높은 목표를 볼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재수, 삼수로 가게 된다. 일부 나이가 적지 않은 선수들은 거기서 주저앉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모든 피겨 선수들이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쳤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아홉번이나 이긴 선수들이기에 더욱 대단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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