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300자 Tip!] 천하장사 계보에서 김정필(41)을 빼놓으면 안된다. 고교 재학 시절부터 특급 스타로 평가받았던 그는 1992년 조흥상호신용금고에 입단했다. 데뷔 첫 해부터 천하장사와 백두장사 타이틀을 휩쓸며 ‘김정필 시대’를 알렸다. 그러나 혹자는 기술 씨름을 보여주지 못한다며 ‘두꺼비’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김정필은 여전히 모래판을 지키고 있다. 못 잊을 사람 강호동, 닉네임에 대한 소회 등을 들었다.
[스포츠Q 민기홍 기자] 김정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씨름을 시작했다. 대구 영신고를 거치며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곧바로 프로 진출을 결심했다.
계약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받았다. 과연 듣던대로였다. 1992년 9월에 벌어진 26대, 1993년 3월에 펼쳐진 27대 천하장사에 연거푸 오르며 전성기를 열었다.
씨름의 중흥기였던 1990년대 초반 화려한 시절을 보낸 이후 울산 현대 씨름단을 거쳐 2003년 은퇴하기까지 천하장사 2회, 백두장사 6회 등 모두 14회나 정상에 올랐다. 통산 전적은 490전 316승174패(승률 0.645)다.
김정필의 앞 시대를 책임졌던 강호동은 예능 MC로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김정필의 뒤를 이어 모래판을 평정했던 ‘소년장사’ 백승일은 가수로 종횡무진 행사장을 누비며 종종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친다.
김정필은 어디 있을까. 그는 여전히 모래판을 지키고 있다.
◆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강호동
“프로 입단하면서 한판 붙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더. 호동이 행님은 제가 고등학교 때 최강자셨거든예. 근데 은퇴를 하시더라고예. 한판만이라도 붙어봤으면 좋았을텐데. 너무 아쉽습니더.”
1989년 등장한 강호동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모래판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백두장사를 거머쥔 그는 프로 데뷔 2년차였던 1990년 천하장사 3개 대회를 모두 휩쓸며 ‘이만기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그는 데뷔 이래 천하장사 3연패를 비롯, 54~56대 백두장사 3연패라는 위업도 달성했다. 한국 스포츠계를 통틀어 최고의 스타였던 그는 5년 동안 활약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라는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채.
김정필은 강호동의 독주를 막을 강력한 신예 대항마로 평가받았다. 만약 강호동이 계속 현역 생활을 유지했다면 김정필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었을 거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는 “3월 백두장사 대회 8강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대회를 앞두고 은퇴를 하셨다”며 “형님이 빠지면서 그 대회 백두장사는 내 차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호동 시대가 저물고 ‘김정필 시대’가 왔다.
그러나 김정필 천하 역시 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백승일, 이태현, 신봉민, 김경수 등의 거센 도전에 정상의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김정필은 “밑에서 후배들이 올라오는걸 보니까 1등 목표로 올라가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르더라”며 “정상을 지키는 것은 부담이었다. 호동 형님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 싶다”고 말했다.
◆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결국 모래판
“공부도, 사회생활도 만만치 않더라고예. 다행스럽게도 주위 분들 도움 많이 받아서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복이 좀 좋았습니다. 하하.”
2003년 모래판에서 물러난 후 그는 학업에 열중했다. 대구보건대 헬스매니지먼트과에 입학해 훗날 지도자가 됐을 때 도움이 될 전문 트레이닝을 공부했다. 2007년 대한씨름협회 민속씨름위원회 기술위원장을 맡으며 샅바와 다시 연을 맺었다.
개인 사업을 통해 외도를 한 적도 있다. 2009년 6월 대구 수성구에서 한우전문점을 열었다. 그는 “고깃집이 망하지는 않았다. 지인분들 덕을 많이 봤다. 도움을 많이 주셨다”며 “그래도 매일 술 한 잔씩 받고 하는 걸 무시 못하겠더라. 건강이 악화돼 그만뒀다”고 전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나 모래판이었다.
김정필은 “1년 지나보니 씨름을 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대구씨름협회 심판이사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1년부터는 국민생활체육 대구시씨름연합회 사무국장도 맡아 행정도 병행했다. 지난 1월부터 그는 대구체육회 씨름부 사령탑을 맡아 현장으로 돌아왔다.
돌고 돌아 다시 온 친정. 하지만 그는 힘들었던 과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김 감독은 “운동할 때부터 천하장사라는 마인드를 많이 버렸다. 세상 사는게 쉽지가 않더라. 좋은 경험이 됐다”며 “진정성 있게 많은 분들을 만났고 조언을 구했더니 도움을 주시더라. 씨름을 그만 둔 후배들도 세상을 알고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 '두꺼비'라는 별명, 이젠 싫지 않아
그의 별명은 ‘슈퍼 두꺼비’였다.
160kg에 가까운 거대한 몸집으로 상대를 누르고 밀어쳤다. 빠르지 않았고 기술이 화려하지 못했다. 백두급의 꽃인 들배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 씨름팬들은 “김정필은 기술 씨름하고는 거리가 멀다”며 강한 비판을 가했다.
“박광덕 다음으로 몸무게가 많이 나가니까 빨리빨리 공격해야지만 승산이 있었지예. 체중이 많이 나가니까 계체하면 지기 때문에 무조건 선공격했어야 했습니다.”
김 감독은 그 별명을 싫어했다. 고등학교 때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마음껏 상대를 들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밭다리, 밀어치기, 빗장걸이 등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선수였기에 경기를 빨리 끝내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두꺼비’로라도 자신을 기억하는 팬들이 고맙단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두꺼비라는 것이 묵묵하고... 오래 버티고 뭐 그런 동물 아니겠습니까. 나중에는 싫지 않더라고예. 제 성격과도, 제 몸집과도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두꺼비’ 하면 저를 기억해주시니까 그것도 좋고예.”
◆ 씨름인의 사명, “씨름 발전 위해 모든 것 쏟아부을 것”
“저는 씨름인의 피가 흐릅니다. 씨름 쪽으로 봉사해야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거든예. 씨름 안 했으면 누가 저같은 놈을 알아보겠습니꺼. 팬들한테 은혜 입었으니까 많이 베풀어야지예.”
김 감독은 씨름을 알리기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씨름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무료 씨름 교실에 강사로 나서 남녀노소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습을 한다.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씨름을 가르친다.
“배운 게 씨름인지라. 저는 씨름인입니다. 옛날에 인기 많이 얻었습니다. 우리 씨름인들이 반드시 되돌려 줘야할 몫입니다. 저는 고향이 대구니까 내 나름대로 내 지역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지역서에 노력해 주시면 다시 씨름이 발전할 것이라 믿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씨름 선수의 위상은 야구, 축구 스타들 못지않았다. 억대 계약금은 기본이었고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은 노소를 불문한 팬들로 꽉꽉 들어찼다. 하지만 요즘은 장사 이름을 들어도 무슨 종목 선수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김 감독은 수차례 씨름인의 사명감을 강조했다.
“스포트라이트 많이 받았습니더. 저는 TV에 나온 사람이라 인기 끌었을 뿐입니다. 씨름 위해서라면 전부 다 내려놓을겁니다. 씨름 인기 많이 떨어졌지만 발전 위해서 함께 노력해주십시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취재 후기] 대구에 있는 그와 직접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만 인터뷰를 해야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와 함께 씨름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고 싶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수한 사투리 속에는 씨름을 향한 ‘무한 애정’이 느껴졌다. 김정필은 평생을 모래판과 샅바싸움에 바칠 것이 분명했다. 김 감독같은 이가 사명감을 갖고 노력하는 한 민속 씨름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씨름을 멀리했던 기자도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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