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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성적대상화 논란, '성 대결'보다 중요한 것 [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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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성적대상화 논란, '성 대결'보다 중요한 것 [기자의 눈]
  • 김지원 기자
  • 승인 2021.01.14 1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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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지원 기자] 최근 온라인에서 아이돌 스타를 성적대상화하는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치열하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된 청원이 올라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었다.

1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딥페이크' 기술로 여성 연예인의 성적 합성물을 만드는 행위를 강력하게 처벌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하루 만에 정부 공식 답변 요건인 20만 명 이상 동의를 얻었다. 청원인은 "여성 연예인들이 '딥페이크' 기술로 고통받고 있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AI)을 사용해 가짜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성인 비디오(AV)에 등장하는 여성의 얼굴을 특정 연예인 얼굴로 바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딥페이크로 만들어진 한국 여성 연예인들의 사진과 영상 등을 각종 SNS와 포털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며 "딥페이크는 엄연한 성폭력이다. 피해자인 여성 연예인들의 영상은 각종 SNS에 유포돼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으며, 성희롱, 능욕 등 악성 댓글로 고통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캡처]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캡처]

 

앞선 11일에는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동성애 주인공으로 삼는 팬픽인 알페스 제작자와 독자들을 처벌해달라'는 청원 글이 올라왔고, 13일 현재 17만 명 이상이 청원에 동의했다. 청원인은 "'알페스'란 실존하는 남자 아이돌을 동성애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차마 입에 담기도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변태스러운 성관계나 강간을 묘사하는 성범죄 문화"라며 "‘알페스’ 이용자들을 수사해 강력히 처벌해달라"고 강조했다. 손심바, 이로한, 쿤디판다, 비와이 등 남자 래퍼들은 '나도 피해자'라며 SNS(사회 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아이돌 성적대상화 논란'은 알페스 처벌 청원자가 '알페스 이용자'를 'n번방'에 비유하면서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를 남녀갈등 양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성 대결'로 보이는 이번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본질에 있다.

# '알페스'가 뭔데?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한 팬픽·브로맨스'

'알페스'(Real Person Slash, RPS를 한국어로 줄여 읽은 말)는 실존 인물을 커플처럼 여기는 것을 뜻하는 말로 1990년대 말 아이돌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팬픽(팬픽션, 팬이 쓴 소설)' 형태로 아이돌 팬덤의 하위문화로 자리잡았다. '슬래쉬(Slash)'는 1960년대 SF 시리즈 ‘스타 트렉’ 남자 주인공을 소재로 한 팬픽에서 연인 관계를 기호 '/'로 표현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1990년~2000년 대 당시 '팬픽'은 소비 방식이 훨씬 공개적이었다. 그 시절을 그린 tvN '응답하라 1997'에는 수업시간에 팬픽을 쓰다 선생님께 걸린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졌고, 심지어 당사자인 아이돌도 방송에서 커플 명칭을 줄줄 외우며 팬픽의 존재를 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각종 예능에서 브로맨스라는 이름으로 출연자들의 관계성을 부각시키는 것, 가상 연애와 가상 결혼 예능도 알페스 문화의 영향 중 하나다.

로맨스뿐만 아니라 판타지, SF, 추리, 호러 등 다양한 장르로 그려지는 팬픽은 미디어로만 제공되는 아이돌의 이미지를 팬들이 다양하게 재가공, 재생산해 향유한다는 점에서 팬 유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획사들이 악플, 불법 합성 등에는 강경대응하지만 알페스는 그레이 존(합법과 불법의 경계)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창작물이지만 지나친 성적 표현이나 묘사가 실존하는 인물에게 성적 모욕감을 줄 수 있다는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알페스 이용자' 처벌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행태를 '성착취'라고 지적하고 있다.

# 딥페이크 유포, 전세계 피해자 중 25%가 한국 여성 연예인

'딥페이크'의 경우 'n번방' 공론화 과정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타인의 얼굴 등을 불법촬영물 등 성착취 영상에 합성해 유포하는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다. 

지난해 3월에는 '여성 아이돌들의 얼굴을 성인 비디오(AV) 배우 등과 합성한 사진, 영상을 공유하는 '성인 딥페이크물' 전용 텔레그램 비밀방에 2000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며, 지난해 네덜란드 사이버 보안업체인 '딥트레이스(Deeptrace)'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발견된 '딥페이크'의 96%가 음란물이었고 이 피해자 중 25%가 한국 여성 연예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최근에도 모모랜드 멤버 낸시가 불법 촬영, 합성된 사진으로 피해를 입은 사실을 밝혔다. 소속사 MLD엔터테인먼트는 "낸시는 불법 촬영과 합성사진의 피해자"라면서 경찰 및 해외 사법기관과의 수사 공조로 불법 촬영자와 최초 유포자를 비롯해 이를 유포하는 모든 이에게 강력한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지난해 6월 개정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딥페이크 영상물을 편집, 합성, 가공하는 방법으로 제작하거나 반포 등을 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된다. 영리 목적인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중처벌 받게 된다.

# 남성 아이돌로 한정한 '알페스' 의제화, 반격의 도구?

주로 팬픽으로 표현되는 '알페스'는 과연 n번방, 딥페이크와 비교될 수 있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처벌할 법적 조항이 명시돼 있는 딥페이크와 달리, 실존인물의 이름만 차용해 가상의 이야기로 묘사되는 팬픽은 처벌 규정이 모호하고 법적인 쟁점도 많다.

일부 누리꾼들은 남성 유저가 많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일어난 알페스 논란 자체가 성 대결을 부추기려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알페스를 문제 삼고 싶었다면 아이돌 전반으로 넓혀 문제를 제기했어야 한다"며 그 대상을 '남성 아이돌'로 특정한 현 상황을 꼬집었다.

딥페이크 처벌, n번방 전원 신상 공개 등 여성이 공론화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방관하던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해 딥페이크, n번방이 저지른 범죄의 본질을 흐리고 '여성도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성적 묘사가 사용된 일부 '수위 팬픽'의 경우 그 정도와 심각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인 것은 사실이다. 긴 시간 '하위문화'로 용인되어온 만큼 아이돌과 팬덤 사이 판매자·소비자 구도, 아이돌 산업의 구조 등 다양한 각도로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현재 도마에 오른 '알페스 처벌' 논의는 정말 '피해를 입은 남성 아이돌'을 위한 숭고한 움직임일까? 아니면 그간 만연했던 여성 아이돌 대상 성범죄의 본질 흐리기를 위한 물타기일까?

한편, 지난 9일 알페스 이슈를 SNS에 올리며 공론화시킨 래퍼 손심바는 "저 짓거리 하는 애들 소라넷, 엔번방 처럼 성범죄자 취급받게 만드는게 목적"이라는 댓글을 단 바 있다고 알려졌다. 알페스가 '제2의 n번방'이라며 '알페스 처벌법'을 발의하겠다고 나선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3월 국회 임시회에 올라간 딥페이크와 n번방 처벌을 위한 제14조의2항(딥페이크 처벌법) 신설 개정법안 투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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