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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혼혈 야구선수 다룬 다큐멘터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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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혼혈 야구선수 다룬 다큐멘터리 나온다
  • 박상현 객원기자
  • 승인 2021.09.2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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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박상현 객원기자]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는 흑인혼혈 선수 하국상이 나온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난 혼혈아로 유년기에 차별을 받은 캐릭터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성격이 난폭해져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서도 폭력배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고(故)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에도 역시 흑인혼혈 선수 찰리 김이 나온다. 찰리 김 역시 차별의 기억 때문에 거친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주인공 독고탁과 필생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두 만화에 나온 선수 모두 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지만 공교롭게도 40년 프로야구 역사에서 흑인혼혈 선수는 없었다. 삼성 라이온즈 창단 멤버인 박찬이 유일한 백인혼혈 선수로 남아있을 뿐이다.

한국 최초 흑인 혼혈 야구선수 김영도 씨. [사진=박상현 강사 제공]

그렇다면 하국상이나 찰리 김 같은 선수가 우리나라 야구사에 아예 없었을까. 아니다. 분명 있었다. 게다가 야구 명문 고등학교의 4번 타자로 활동했다. 유명한 대회에서도 준우승까지 차지했던 멤버였다. 그리고 훌륭한 제자까지 키운 뒤 도미했다. 동대문상고와 동아대를 나온 김영도(68)씨가 주인공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으로 시계를 돌리면 우리의 1970년대는 먹고살기에 전력투구를 하던 시기였다. 1970년대초는 북한보다도 경제 수준이 떨어지던 시기였다. 또 이 시기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태어난 피부색이 다른 혼혈인들이 늘어나던 때이기도 했다. 만화의 하국상이나 찰리 김처럼 그들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김영도 씨도 다르지 않았다.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영도 씨는 인천 부평의 명성원이라는 혼혈인들이 모여있는 고아원에 제발로 들어갔다. 김영도 씨는 "어머니와 떨어져 비슷한 아이들이 모여 같이 밥을 먹고 공부하는 것이 속이 편했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또래 아이들이 피부색으로 놀리면 "그래 나 검둥이야"라고 외쳐봤지만 어린 속은 시퍼렇다 못해 시꺼멓게 멍들어갔다.

그런 그의 인생이 항상 나쁘고 힘들기만 하진 않았다. 1970년대에 뜨거운 열기를 모으기 시작하던 고교야구가 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야구가 그의 구원이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동대문중학교에 입학한 1966년 3월에 당시 이인근(작고) 교장의 눈에 띄었다. 이인근 교장의 권유로 함께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같은 흑인혼혈인 남영수(작고)씨와 야구를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운동 기량이 타고났기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동대문중학교의 정규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성장하면서도 혼혈이라는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따라다녔고 이는 사춘기의 김영도 씨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잡아준 것은 당시 한국고교야구연맹 전무이사였던 남주현(작고) 교사였다. 남달리 유쾌한 성격을 지닌 김영도 씨는 중학교 3학년 때 가방에 '뭘 봐!'라고 직접 써붙이고 다녔다. "빤히 쳐다보는 주위 눈길에 그렇게 썼다"는 것이 김영도 씨의 얘기다. 일종의 반항이자 소리없는 외침이었다. 남주현 교사가 그런 그를 잡아줬다. 김영도 씨는 "당시 남주현 선생님이 운동에만 신경쓰게 하고 외출할 때는 친구들을 꼭 동행시키도록 했다"고 회상한다.

동대문상고에 진학한 김영도 씨는 1루수를 맡으면서 3번 또는 4번 중심타자로 활동했다. 동대문상고는 윤동균 KBO 위원을 비롯해 MBC에서 활약했던 김인식 연천 미라클 감독,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 우승을 안긴 만루홈런을 친 김유동 등을 배출한 야구 명문이다. 이후에도 MBC에서 뛰었던 김상훈, 김용수 등이 동대문상고를 나왔다. 지금은 청원고가 동대문상고의 야구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영도 씨와 동대문상고에서 3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김인식 감독은 "영도는 매우 특별한 친구였다. 흑인혼혈이라서 주위 따가운 시선을 많이 받았는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영도 씨는 물론이고 동대문상고에 기억에 남는 해는 바로 1970년이다. 동대문상고는 청룡기에서 1965년과 1989년 등 두번의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다른 대회에서는 정상에 오른 역사가 없다. 그런데 1970년은 동대문상고가 대통령배에서 결승까지 올랐다. 상대는 영남지역 야구 명문인 경북고였다.

1970년 5월 7일 지금은 없어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야간경기로 치러진 대통령배 대회에서 동대문상고는 상대 에이스 남우식의 위력적인 투구에 5회말까지 2루조차 밟지 못했다. 그러나 6회말 2사 만루에서 3번 타자로 나선 김영도 씨의 적시타가 나오면서 추격의 발판을 놨고 이어진 적시타로 3-2 역전에 성공했다. 3루 주자였던 김영도 씨는 포수 패스트볼로 홈까지 밟으며 정상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마운드 난조로 4-4- 동점을 허용했고 이후 유격수 김인식의 실책으로 재역전을 허용했다. 결국 동대문상고는 4-6으로 져 대통령배 우승기를 경북고에 내주고 말았다. 이날 경기는 아직까지도 동대문상고의 유일한 대통령배 결승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흑인혼혈이라는 꼬리표는 고교 졸업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야구장에서 들려오는 관중의 야유는 그의 마음을 늘 흔들어놨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야구를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남주현 교사가 그를 잡았다. 여기에 언제나 먼발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김영도 씨의 모친도 그에게 큰 힘이었다. 당시 부산에서 살고 있던 모친은 이따금씩 김영도 씨를 만나 모자의 정을 나눴다.

그러나 김영도 씨는 피부색 때문에 진로를 결정하는데 고민하게 된다. 김영도 씨는 기업은행 같은 실업팀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실업팀은 오전에 넥타이를 매고 근무하다가 오후에 운동하러 가는 시스템이었다. 남들과 다른 피부색 때문에 선발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안영필(작고)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안영필 감독은 당시 유일한 지방 팀이었던 동아대학교를 지휘했던 부산의 대표적인 야구인이었다. 동아대 야구부와 한일 대학 친선 대회 감독을 역임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동아대학교 교수, 부산야구협회 전무이사, 대한야구협회 이사, 부산원로체육인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안영필 감독이 있었기에 김영도 씨는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서 야구 선수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김영도 씨는 대학에서도 3, 4번 타자와 1루수를 도맡았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1975년 4월 23일의 일이다. 동아대는 중앙대와 대학야구연맹전 7회말에 박상규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고 만다. 휘문고에서 딱 한번 홈런을 친 뒤 대학 4년 동안 처음으로 얻은 홈런이었기에 박상규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러나 김영도 씨의 재치가 빛났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1루를 밟지 않고 지나간 것을 유심히 지켜 본 김영도 씨는 기념으로 간직하려던 홈런 공을 박상규로부터 받아낸 뒤 1루를 찍어 아웃을 시킨 것. 박상규는 땅을 치며 분명히 1루를 밟고 지나갔다고 항변했지만 1루심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김영도 씨는 "당시 내가 잔인했었나. 그래도 당시 이기겠다는 마음 뿐이라서"라고 웃는다. 당시 동아대는 중앙대에 0-4로 졌는데 MBC에서 활약했던 유종겸(현 안산공고 코치)이 9이닝 피안타 3개로 완봉승을 거뒀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성균관대와 경기에서 타격을 한 뒤 이를 악물고 1루로 달려간 김영도 씨는 자신이 세이프된 줄 알았지만 먼저 태그가 됐다는 김동엽 1루심(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맞다)으로부터 아웃 판정을 받았다. 태그가 되지 않았다며 펄쩍펄쩍 뛰며 항의해봤지만 김동엽 1루심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퇴장까지 당했다. 이 떄문에 '그라운드의 와일드 가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김영도 씨는 "경기가 끝나고 나서 성균관대 선수들과 술 한잔 기울이는데 당시 1루수가 '태그 안 됐는데'라고 실토하는 바람에 내가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당시 회식 자리가 엉망이 된 기억이 있다"고 껄껄 웃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승부욕 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대문상고와 동아대의 중심타선에서 활약하고 신체 조건도 뛰어나며 승부욕까지 뒤지지 않는다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 역사의 한 획을 그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영도 씨는 끝내 한국 야구의 주류에 합류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흑인혼혈이라고 차별 받았던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큰 꿈이 있었다. '흑인 피가 섞여서 운동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김영도 씨는 동아대학교 대학원까지 진학해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대학 졸업 이후 김영도 씨는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부산 대신중학교에서는 야구팀 감독까지 맡았다. 경남중학교에 명성에서 밀린 감이 없지 않지만 대신중 역시 부산에서 알아주는 야구팀이다. 김영도 씨가 대신중학교 감독을 맡으면서 이종운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과 윤동배, 윤형배 형제를 직접 키워냈다. 현재 부산에서 96마일 베이스볼 스쿨을 운영하고 있는 윤형배 코치는 "야구를 보고 있다가 외국인인줄 알고 형과 함께 다소 좋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분이 김영도 감독님이셨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김영도 씨도 윤동배-윤형배 형제의 얘기를 하자 "당시 동생 형배가 좀 나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환하게 웃는다.

지금 김영도 씨는 미국에 있다. 결혼을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역시 검은 피부였다. 피부 색깔 때문에 당했던 아픔과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1982년 10월 레이건 정부가 혼혈인 이민법을 제정하면서 1952년부터 1982년 사이에 미군 아버지와 아시안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범죄기록이 없는 혼혈인들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모시고 올 수 없다거나 혼혈인들 스스로 아버지가 미군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긴 했지만 그 난관을 뚫고 김영도 씨는 이민을 결심했다. 김영도 씨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한 것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온 것이다. 아이들이 피부색 때문에 손가락질 받는 일 없이 아주 잘 산다. 지금 어렵게 살긴 하지만 그래도 단 한번도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힘줘 말한다.

김영도 씨가 미국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야구계로서는 아까운 인재 한 명을 잃은 셈이 됐다.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신체조건을 지닌 선수였기에 프로야구에 데뷔했다면 프로야구 초창기 역사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혼혈 선수들이 야구를 비롯해 다른 종목에도 많이 진출해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다면 현재 한국 스포츠의 모습도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OSEN, 스포츠Q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필자는 홍지영 남네바다주립대 겸임교수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 김영도 씨를 통한 한국 스포츠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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