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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도 생각한 이장군, 카바디 대표하기에 [SQ인터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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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도 생각한 이장군, 카바디 대표하기에 [SQ인터뷰②]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1.10.20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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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스포츠Q(큐) 글 안호근·사진 손힘찬 기자] 뭉쳐야 찬다 시즌2가 방영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장군(29)을, 카바디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택시를 타면 그에게 운동선수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처음엔 카바디 선수라고 설명했으나 나중엔 이마저 포기했다. 그만큼 생소한 종목이 카바디였다.

뭉쳐야 찬다2 출연 이후 자신은 물론이고 카바디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는 게 체감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오래도록 카바디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은 ‘코리안 킹’ 이장군. 그와 심도 깊은 카바디 이야기를 나눠봤다.

* 뭉쳐야 찬다-축구 이야기는 인터뷰 1편, 카바디의 미래에 대한 내용은 3편에서.

뭉쳐야 찬다2 오디션 합격 후 울컥했던 이장군. 드디어 카바디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쳤다.

 

◆ 대체 카바디가 뭐기에

뭉쳐야 찬다2 오디션에서 첫 합격자가 된 이장군은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에도 뭉쳐야 찬다를 보며 “카바디가 유명했으면 나도 저기 있을 수 있었을텐데”라고 생각했던 그다. 드디어 카바디를 알릴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그간 노력과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국에서 카바디는 여전히 낯선 종목이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반짝 관심을 받았으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장군이 처음 카바디를 접한 2010년대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열악했다.

축구선수를 꿈꿨지만 가정형편으로 인해 포기한 이장군은 이후에도 꾸준히 스포츠와 함께 했다. 조정 선수로도 뛰었고 동의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2011년엔 우연히 카바디협회 사무처장에 눈에 띄어 카바디로 입문하게 됐다.

“당시엔 아무것도 몰라서 안하려고 했다. 훈련장에 구경 오라고 하셨는데 궁금하긴 해서 한 번 가봤다”는 이장군. 우연한 카바디와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구기 종목도 좋아하지만 투기 종목에 대한 관심도 컸다. 유도도 했었고 합기도, 태권도 학원에 다니며 겨루기 대회에도 나가봤다. 직접 부딪치며 펼치는 종목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카바디는 인도에서 시작된 스포츠로 힌디어로 ‘숨을 참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공격자는 계속 카바디를 외치며 공격한다. 공격과 수비를 나눠 진행되는데 수비팀에선 7명, 공격팀에서 한 명이 나선다. 공격자는 상대 진영에 들어가 수비수를 터치한 뒤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면 득점하는 방식인데, 수비수들은 공격수의 복귀를 막기 위해 거친 태클을 서슴지 않는다.

수비할 땐 철저한 팀 종목이지만 공격할 땐 개인의 역량이 중요하다. “개인과 단체 종목이 다 합쳐진 느낌이라 더 좋았다”며 “공격할 때도 수비할 때도 종목 특성상 힘과 스피드가 고루 필요하다. 전후반 각각 20분 동안 체력을 써야 하기에 지속력과 순간적인 힘, 스피드 등 많은 걸 다 갖춰야 하기에 다른 종목에 비해 다방면으로 능력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게 카바디의 매력”이라고.

카바디 종주국 인도에서 역대 최초로 억대 연봉을 받는 외국인 선수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 과정은 힘겹기만 했다.

 

◆ 고난의 연속, 인도 슈퍼스타가 되기까지

스키점프를 소재로 다룬 영화 국가대표. 불모지인 한국에서 첫 국제대회에 나서기 위해 다른 운동을 하던 선수들을 영입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장군은 “영화 국가대표를 보고 우리도 영화화하기에 충분한 스토리라고 느꼈다”고 했다. 카바디의 발전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국가대표 실존 캐릭터이자 이젠 뭉쳐야 찬다2 동료가 된 강칠구가 “스키점프 초반 때와 너무 비슷하다”고 말한다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카바디는 2010년도에 본격적으로 국내에 도입됐다. 어깨너머로 카바디를 배운 상비군 선수들이 새로 들어온 선수들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유도, 레슬링, 태권도 출신 등 외인구단처럼 여기저기서 불러 모아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목표로 준비했다. 일부 선수들이 인도에서 배워온 기술을 전수해주는 식의 훈련과 교육 과정이었다.

이후엔 인도 출신 코치를 초빙하기도 했고 현지 전지훈련도 다녔다. “처음 시작할 때는 기초적인 부분을 배우기가 어려웠다. 인도에 전지훈련 갔는데 그때 정확하게 배웠다”는 이장군의 말처럼 이젠 보다 체계화되고 전문적인 훈련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선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바디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선수는 드물다. 국가대표 동료들도 헬스 트레이너, 축구 교실 코치, 초등학교 스포츠 강사, 태권도 사범 등으로 다양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훈련이 어려워지자 군 입대한 선수도 있다.

이런 동료들과 카바디 선수를 꿈으로 삼는 후배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게 이장군이었다. 2014년 인도에서 프로리그가 출범됐는데 인천 아시안게임 준비 도중 출전한 2013년 인천 실내 무도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수확하며 주목을 받았다. 인도 외 국가 선수가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기에 눈길을 끌었고 뱅갈 워리어스의 러브콜을 받았다.

부모님의 말씀 한마디는 포기하고 싶었던 이장군에게 큰 힘이 됐다. 한국 카바디를 대표한다는 생각은 이장군을 버티게 해줬다.

 

흥미로운 건 모든 게 생소한 곳에서 자신의 적응만을 위해 힘써도 모자랄 판에 이장군은 대표팀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인도를 꺾어야 했다. 이기기 위해선 동굴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같이 생활하고 겪으면서 선수들을 파악했고 한국에 돌아와선 배워온 걸 선수들과 공유하고 알려주며 분석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처음 300만 원에 그쳤던 이장군의 연봉은 어느덧 1억 원을 돌파했다.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가 됐고 ‘코리안 킹’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모든 게 생소했고 어려웠다. 무릎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부상을 이겨내기 위해 더 열심히 운동했는데 그럼에도 허리를 크게 다쳤을 땐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카바디 관련해서는 월등하지만 의료시스템이나 인식 등에선 아직 부족함이 많다. 이로 인한 갈등도 많았다. “한국 팀 닥터에게 물어보면 운동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인도에선 아픔을 참고 뛰어야 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인도에선 다쳤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밝혔다.

가족들의 존재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이때까지 무슨 운동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카바디를 한다고 했을 때도 ‘하고 싶은 거면 해보라’고 해주셨다”며 “인도에 진출할 때도 ‘적극적으로 지원 못해줬는데 좋은 경과를 내 고맙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다. “카바디와 생계를 고민하다가 그만 두는 친구들도 많았다”며 “이걸로 못 먹고 살 것 같으면 다른 길을 찾으라고 하셨을 것 같기도 한데 ‘너라도 끝까지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셔서 더 자신감이 생겼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첫 시즌을 겪고 온 이장군은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더 느꼈다. 코트에서 전략 등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했으나 팀 스포츠이기에 조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더 많은 소통이 필요했다. 데뷔 시즌을 마친 뒤 인도로 돌아가기 전까지 영어 과외를 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실력과 소통, 부상을 이겨내는 인내심까지. 이장군이 억대 연봉을 받는 카바디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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