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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저축은행,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닭장의 꿈' [여자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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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저축은행,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닭장의 꿈' [여자배구]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1.11.10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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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의겸 기자]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가수 인순이가 부른 노래 '거위의 꿈' 가사가 떠오른다. 기존 6개 구단에서 주로 백업에 머물렀던 선수들이 여자배구 신생팀 광주 페퍼저축은행에선 주축으로 날아올랐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신인과 잠시 프로를 떠났던 인원들이 팀 구성원 절반에 달하는 막내 구단이 첫 라운드가 끝나기도 전에 창단 첫 승에 성공했다.

한 세트 안에서도 선수 간 교체가 잦은 배구에서 후보 선수들이 대기하며 곧장 투입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장소가 바로 웜업존이다. 이 웜업존을 배구계에선 속칭 '닭장'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쯤 되면 거위의 꿈 아닌 '닭장의 꿈' 격이다.

페퍼저축은행은 9일 경기도 화성종합체육관에서 열린 2021~2022 프로배구 도드람 V리그 1라운드 원정경기에서 화성 IBK기업은행을 세트스코어 3-1(25-21 25-21 22-25 25-23)로 눌렀다. 외국인선수 엘리자벳이 양 팀 최다인 39점을 몰아쳤고 이한비가 13점, 박경현이 8점으로 거들었다.

[사진=KOVO 제공]
페퍼저축은행이 V리그 입성 6경기 만에 창단 첫 승을 올렸다. [사진=KOVO 제공]
[사진=KOVO 제공]
선수들 대부분이 직전 소속팀에선 주전보다 백업으로 활약했다. [사진=KOVO 제공]

한국배구연맹(KOVO)으로부터 창단 승인이 떨어진 게 지난 4월이니 6개월 만에 기념비적인 첫 승리를 따냈다. 개막 후 내리 5연패를 달렸던 페퍼저축은행이 올 시즌 목표인 '5승'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셈이기도 하다.

공교롭게 10년 전 2011년 제6구단으로 V리그에 참가하기 시작한 IBK기업은행을 상대로 마수걸이 승전보를 전했다. IBK기업은행은 2012~2013시즌부터 곧장 통합우승을 차지한 뒤 6회 연속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는 등 지난 10년간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명문 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정규리그 우승 3회, 챔피언결정전 우승 3회 금자탑을 쌓았다.

지난 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PO)에 진출했고, 올 시즌 앞두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활약한 김희진, 김수지, 표승주 등 간판선수들의 유명세에 힘입어 여자배구 최고 인기구단으로 떠올랐다. 샐러리캡(팀 연봉 총액) 간극도 상당한 페퍼저축은행의 첫 승 제물이 됐으니 IBK기업은행으로서는 굴욕 아닌 굴욕이기도 하다.

구성원 대부분이 프로에서 주전보다는 뒤를 받치는 역할을 주로 했다.

주장 이한비부터 세터 이현, 미들 블로커(센터) 최가은, 최민지, 윙 스파이커(레프트) 지민경 등은 기존 6개 구단이 신생 구단 창단을 협조하는 과정에서 제출한 보호선수 9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선수들이다. 가능성을 알아본 페퍼저축은행으로부터 특별지명돼 이전보다 많은 기회를 얻고 있다. 이날 선발 출전한 레프트 박경현을 비롯해 리베로 문슬기, 세터 구솔 등 역시 페퍼저축은행에 오기 전에는 프로에 소속팀이 없었다.

[사진=KOVO 제공]
엘리자벳(오른쪽 두 번째) 활약에 힘입어 여자배구 최고 인기구단 IBK기업은행을 침몰시켰다. [사진=KOVO 제공]
[사진=KOVO 제공]
막내 구단은 감격적인 첫 승리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KOVO 제공]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한 엘리자벳이 예상대로 걸출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4강을 이끈 김형실 감독은 특별지명부터 신인 선발까지 당장의 성적보다 멀리 내다보고 차근히 팀 기틀을 다지겠다는 방침을 강조해왔다. 올 시즌 목표를 '5승'으로 설정한 것 역시 착실히 경험을 쌓아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뜻이 깃들었다.

허나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 이상이다. 개막전부터 대전 KGC인삼공사를 상대로 먼저 세트를 따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난 5일에는 이번 시즌 6전 전승을 달리고 있는 현대건설을 맞아 풀세트 접전을 벌이며 첫 승점을 올렸다. 결국 올 시즌 전력이 불안한 IBK기업은행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올림픽스타는 커녕 기존에 V리그에서 스타플레이어로 통했던 선수도 하나 없다. 전 소속팀 감독들은 그동안 출전시간이 부족했지만 가능성만큼은 충분했던 이 선수들이 새 소속팀에서만큼은 출전시간을 보장받고 잠재력을 폭발시키기를 바랐을 터. 이들이 똘똘 뭉쳐 1라운드 만에 승리라는 성과를 달성해 고무적이다.

거위의 꿈 도입부는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위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라고 외친다. 

페퍼저축은행의 비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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