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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윤봉우의 마지막 1년(feat. 대한항공 토미 감독) [SQ인터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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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윤봉우의 마지막 1년(feat. 대한항공 토미 감독) [SQ인터뷰①]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1.12.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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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스포츠Q(큐) 글 김의겸·사진 손힘찬 기자] 레전드 미들 블로커(센터)로 통하는 윤봉우(39) 이츠발리 대표는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V리그 남자부 블로킹 역대 통산 4위(907개)에 올라있으며,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남자배구 황금기를 함께한 그는 지난해 여름 돌연 일본에 진출했다.

현역으로서 황혼기. 커리어를 함께 시작한 동료들이 줄줄이 은퇴를 선언했지만 윤 대표는 끝을 미루고 미뤘다. 과거 천안 현대캐피탈이 제안한 지도자 자리를 거절한 것도, 일본 나고야 울프독스와 계약한 것도 해보고 싶은 걸 모두 해본 뒤에야 '후련하게' 코트를 떠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도의 배구를 경험하고 돌아온 그는 "몸이 내게 '주인님 이제 그만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웃으며 은퇴를 결심한 배경을 전했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그가 차린 배구 아카데미 '이츠발리'에서 아직은 선수 호칭이 더 익숙한 윤 대표와 만났다. 베일에 가려졌기에 더 진한 궁금증을 낳는 그의 일본 생활과 은퇴 이후 삶에 대해 들었다. 성인 무대에서만 20년을 보낸 그 성실함이 어디가겠나. 분주히 제2 배구인생을 꾸리기 시작한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지난여름 은퇴를 선언한 뒤 서울 한복판에 배구 아카데미를 세운 윤봉우 대표.
지난여름 은퇴를 선언한 뒤 서울 한복판에 배구 아카데미를 세운 윤봉우 대표.

◆ 레전드 윤봉우, 말년에 떠난 일본

윤봉우 대표는 2019~2020시즌 서울 우리카드의 V리그 1위 등극에 힘을 보탠 뒤 또 한 번 기로에 섰다. 많은 이들이 은퇴를 예상할 때 그의 선택은 일본 진출. 한국선수로는 2009~2011년 JT마블러스에서 활약한 김연경(상하이 유베스트) 이후 오랜만에 일본에 가게 됐다. 남자선수로 한정하면 강만수 전 감독 이후 두 번째며, 일본 V리그가 출범한 뒤로는 최초였다.

윤 대표는 "행운이라면 행운인데, 나고야에서 먼저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해왔다. 막연히 '언젠가는 외국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그동안 일본에선 한국선수들의 연봉이 높아 부르지 못했다고도 한다"고 회고했다. 

일본 V리그는 한국에 비해 연봉 수준이 많이 낮다. 프로라고 하지만 아직은 실업 소속 회사원 개념의 선수들도 많다. 제일 잘하는 선수가 2~3억 원대 연봉을 받는다. 가장 전력이 약한 팀은 준종합병원에서 운영하는 팀으로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게 윤 대표 설명이다. 하지만 상위권은 한국 V리그 우승권과 견줘도 밀리지 않는다. 과거 한국이 그랬듯 자유계약으로 외국인선수를 선발하는 만큼 수준급 외인들도 만나볼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 받던 것과 비교하면 연봉 수준에 차이가 컸지만 상관없었다. 그동안 돈은 많이 벌었다.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전에 현대캐피탈 코치직 제안을 거절했을 때와 마찬가지. 호기심과 욕심 때문에 일본으로 날아갔다"며 "일본에 체류한 9개월간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다. 그러면서 왜 외인들이 한국 V리그가 좋다고 하는지 알았다"며 웃었다.

한국 리그를 주름잡던 센터다. 국가대표팀 경력도 화려하다. 키 199㎝ 일본에 흔치 않은 장신에 경험도 풍부한 베테랑 센터의 입단에 구단에선 집과 차량을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한국과 비교하면, 좋은 말로 해 색달랐지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했다. 통역이 없는 건 당연했다. 땅이 큰 만큼 원정경기 일정에 하루를 꼬박 다 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일본 V리그 나고야 울프독스에서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을 보낸 윤봉우 대표. [사진=윤봉우 대표 본인 제공]
윤봉우 대표는 2019~2020시즌 우리카드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1위로 마치는 데 힘을 보탰다.

윤봉우 대표는 "자전거로 집에서 훈련장까지 다닐 수 있을 만큼 가까워 차는 거절했다. 하지만 겨울에 쉬는 날이 많을 때 너무 추워 내 돈으로 차를 렌트해 돌아다녔다"고 멋쩍게 웃으며 "의사소통은 영어로 했다. 일본 리그는 외인 감독이 많았기에 선수들도 영어로 소통하는 데 익숙하다는 점이 한국과 가장 큰 차이"라고 설명했다.

"시즌 중반 축구로 치면 FA컵 같은 전국 단위의 컵대회가 열리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큐'에서나 봤던 장면이 펼쳐진다. 큰 체육관 4개의 코트에서 동시에 경기가 진행되니 도떼기 시장 같기도 하다. 라커룸도 따로 없어 관중석 뒤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중고등학교 때가 떠올랐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일본에서 단 1년을 보냈지만 주변 배구인들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에피소드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한국은 버스로 원정을 가지만 일본은 주로 지하철과 기차를 이용해 이동한다. 나고야에서 3시간 정도 거리였던 오사카는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그보다 먼 거리는 지하철과 신칸센으로 움직였다. 한국에서 최고 스타로 통했던 파다르도 일본에선 구단 스폰서가 박힌 트레이닝복을 입고 지하철과 기차로 이동하더라."

윤 대표는 "경기가 끝나고 식당에 가는 게 아니라 도시락을 먹는다. 인터뷰나 행사가 있으면 먼저 출발하지 않고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되기를 기다린다. 주말 오후 12시 경기를 시작했는데, 체육관을 나올 때 이미 오후 5시였다. 역으로 가서 신칸센을 타고 다시 지하철을 거쳐 집에 오면 밤 12시. 식당이 다 닫으니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며 웃었다.

장신 센터가 흔하지 않은 일본 리그에서 키 199㎝ 윤봉우 대표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나고야가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힘을 보탰다.

◆ 일본 배구, 한국의 베테랑 눈에는 어떻던가요?

윤봉우 대표는 지난 시즌 나고야에서 현재 인천 대한항공을 이끌고 있는 토미 틸리카이넨(핀란드) 감독과 함께 했다. 의욕 넘치게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기대만큼 임팩트 있는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팀이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지만 윤 대표는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웠다.

그는 "돌아보면 내가 못했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시간도 부족했다. 1~2개월만 더 빨리 갔다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토미 감독의 배구는 처음에 적응하기 어렵다. '이게 될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스마트한 배구를 하겠다는 그는 '때려서 만드는 득점이나 밀어넣어 만드는 점수나 같다'며 '한국 배구는 너무 클래식하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2m가 되지 않는 190㎝대 센터가 많은 일본에서 윤봉우 대표는 높이에서 확실한 강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윤 대표의 출전시간이 충분하진 않았단 점에서 한국과 일본리그 스타일 차이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윤 대표는 "일본 대표팀 센터들은 크지만 1부리그 평균 신장은 작다. 높지 않아도 팀플레이가 좋고, 세터와 호흡이 잘 맞으면 뛸 수 있는 구조다. 반대로 그 정도 키, 그 정도 실력을 갖춘 일본 센터들이 한국에 오면 높이가 낮아 뛰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팀마다 색이 워낙 다양한 데다 주말에 경기를 몰아서 하는 만큼 로테이션도 필수라 작은 선수들도 경기에 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고야에서 토미 틸리카이넨 현 대한항공 감독 지도를 받았다. [사진=윤봉우 대표 인스타그램 캡처]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의 대한항공은 시즌 초 부침을 견뎌내고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사진=KOVO 제공]

일본 무대를 가장 먼저, 그리고 대한항공보다 앞서 틸리카이넨 감독 지도를 경험한 윤봉우 대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배구 팬들의 흥미를 자아내기 충분해 보인다.

윤 대표는 "일본 상위 세 팀 정도는 한국 상위권과 수준이 비슷하다. 자유계약으로 외인을 뽑는 만큼 파다르도 외인 중에선 평범한 수준이었다. '위에서 때려도 밑에서 다 받아낸다'는 느낌의 배구랄까. 미카사 공은 스타 공에 비해 반발력이 적어 수비에 더 유리하기도 하다"며 일본배구 특성을 설명했다.

토미 감독은 대한항공에 부임해 반 박자를 넘어 한 박자 빠른 배구를 하겠다고 나섰다. 시즌 초 부침을 겪었지만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경기력이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평가다.

"토미 감독 배구를 처음 접하면 '왜 배구를 저렇게 꼬아서 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뿐만 아니라 일본 선수들도 처음에는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 쉬운 배구는 한편으로 상대 입장에서 막기 쉽다는 말도 된다. 밥 먹을 때 토미 감독이 내 옆에 와서 티슈를 하나 꺼내들더니 코트를 그린 적이 있다. 센터 없이 날개 공격수만 5명 코트에 있다고 가정해보자면서 좌우 중앙은 물론 후위의 2명까지 백어택으로 공격에 가담하면 어떨 것 같냐고 묻는 사람이다."

"상대 블로커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먼저 한 발 움직이면 바로 반대쪽으로 공을 띄워 공격하는 배구다. '빠른' 배구라 하면 안테나 밖에서 이뤄지는 공격이 많은데, 토미의 배구는 안테나 안 좁은 공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배구"라며 "어렵긴 하지만 몇 년 쌓이면 정말 무서울 것이다. 대한항공은 재료가 워낙 좋아 잘할 것이다. 세터 (한)선수도 처음에는 헤매더니 적응하는 것 같다. 토미 감독의 색이 잘 입혀지고 있다. 잘 따라가고 있다."

[사진=KOVO 제공]
2005~2006시즌 현대캐피탈의 통합우승 주역 중 하나인 윤봉우 대표. [사진=KOVO 제공]
[사진=연합뉴스]
국가대표로서 남긴 족적도 화려하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남자배구 대표팀 최고 성적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은메달이다. [사진=연합뉴스]

◆ 항상 떠올린 단어 '은퇴', 다 이룬 자의 동기부여

"시즌 중반 계속 무릎에 물이 찼다. 몸이 '주인님 이제 그만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주중 경기가 없는 일본 리그 특성상 워낙 쉬는 시간이 많아 충분히 쉬면 괜찮아졌지만, '다른 곳에서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 살까지 했으면 충분히 했다는 생각,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V리그가 종료되고, 시즌을 마무리하는 컵대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됐다. 그렇게 일본에서 한 시즌을 마친 그는 이제 정든 코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2015~2016시즌 현대캐피탈에서 플레잉코치로 뛴 이후에도 5시즌이나 더 현역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철저히 또 절실히 매 순간 임했는지 말해준다. 현대캐피탈을 떠난 뒤 거친 수원 한국전력, 우리카드, 나고야에서 모두 팀의 봄 배구 진출을 도왔다.

"후련했다."

"현대캐피탈에선 아킬레스건, 한국전력에선 골반을 크게 다쳐 수술을 고민했다. 수술하면 거의 은퇴해야 하는 수준의 부상이었으니 돌아보면 아쉬운 게 사실이다. 매일 매일 은퇴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 선수들과 하다 보면 저 친구가 저만큼 하는데, 저거보다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매 경기 베스트6 출전 여부가 자극이었고 동기부여였다. 나는 점점 회복이 안 되는데 후배들은 쌩쌩하니, 나도 그에 발 맞춰 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윤봉우(사진) 대표는 거쳤던 모든 팀에서 좋은 기억을 안고 떠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밝혔다.
우리카드는 한국에서 몸 담은 마지막 팀이 됐다.

"이적할 때마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계기가 생겼다. 한국에서 뛰었던 모든 팀에서의 생활이 기억에 남는다."

"현대캐피탈 시절을 돌아보면, 그 나이 때는 몰랐지만 정말 좋은 곳이었구나 싶다. 그 안에 있는 선수들은 모른다. 나도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 한국전력에선 또 다른 경험을 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선수들끼리 똘똘 뭉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기분이 뭔지 느꼈다. 우리카드 역시 다른 팀에 비해 역사가 짧은 만큼 이제 새롭게 만들어내야 했던 곳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던 결승전 경기 영상은 지금도 집에서 가끔식 틀어보곤 한다. 소중하고 고맙지만 당시에는 지금만큼 감사히 여기진 못했다. 몸이 정말 좋았고, 스스로도 주변에서도 배구를 잘 한다고 하던 시기다. 다 같이 고생하고 주변에서 도와줘서 만들 수 있었던 값진 순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많이 커서 그 메달을 목에 걸고 다니고, 우승 반지도 끼고 다닌다. 얼마 전에는 그 메달을 팔아 게임기를 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며 웃는 윤봉우 대표 얼굴에 담긴 격세지감의 감정이 기자에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윤봉우 이츠발리 대표 인터뷰는 ②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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