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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가 유럽 진출 러시 이루는 이유 [SQ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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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가 유럽 진출 러시 이루는 이유 [SQ포커스]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2.03.1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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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차붐’ 차범근(69)이 유럽 축구 진출의 선구자라면 ‘해버지’ 박지성(41)은 해외 진출 러시의 물꼬를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이라는 ‘월드클래스’를 배출했고 그 후에도 황희찬(울버햄튼 원더러스), 김민재(이상 26·페네르바체), 이번 겨울 이적시장에선 미래가 촉망되는 이동경(25·샬케04), 이동준(25·헤르타 베를린)에 이어 K리그 신예 정상빈(20·그라스호퍼 취리히)까지 유럽 땅을 밟았다.

선수들 개개인 역량만 놓고 보자면 과거 어느 때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축구가 이토록 넓고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며 꿈의 유럽 축구 무대 진출 러시를 이루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골든에이지 1세대 정상빈은 K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자마자 곧바로 유럽에 진출하며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대표하고 있다. [사진=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홈페이지 캡처]

 

◆ 길고 긴 학원 체육 잔혹사를 지나?

손흥민은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유럽에서도 톱클래스 선수로 평가를 받으며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 박지성과 비교하며 누가 더 훌륭한 선수인지를 따지는 비교가 끊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차범근과 박지성이 바로 한국 축구의 암흑기를 거쳐 태어난 ‘돌연변이’였기 때문이다.

차범근은 말할 것도 없고 박지성 시대만 하더라도 요즘엔 일반적인 것으로 여기는 인조잔디에서 뛸 기회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인프라가 부족했다. 선수들은 흙바닥에서 뛰고 구르며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게 일상이었다. 월드컵과 같이 큰 무대에서도 ‘홈런볼’을 차는 선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학 혹은 프로에 가서나 잔디 혹은 인조잔디를 밟게 됐고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어온 습관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다. 흙바닥에서 차듯 조금만 공 밑을 차도 공은 ‘뻥’하고 높게 솟아올랐고 이를 지켜보던 축구 팬들은 한숨을 쉬어야 했다.

학원 체육 시스템은 성적 지상주의의 온상이었다. 자신이 지도하는 학교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감독 코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박한 환경에서 지도자들은 모든 선수들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훈련이 아닌 오직 승리를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주입시키기 바빴다. 성적과 출전시간 등이 진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학부모들은 자녀의 출전을 위해 지도자들의 부당한 요구에도 쩔쩔매야 했다. 각종 폭력, 갑질 사건이 만행했던 시기. 제대로 된 인재 양성이 이뤄지는 게 기적적인 것처럼 보였다.

안정환, 윤정환, 고종수와 같이 창의적인 플레이를 바탕으로 천재 소리를 들은 선수들의 등장에 대중은 열광했지만 구조적으로 이 같은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주말리그 창설로 본격적인 유스시스템이 탄탄하게 자리잡게 만든 K리그 주니어.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 구단이 중심에, 유스시스템 도입이 불러온 변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한국 축구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학원 체육의 틀에서 벗어나 선수들이 공부도 하면서 보다 전문적이고 성적에만 얽매지 않는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K리그 각 클럽들은 지역 중·고등학교와 연계하는 등 유스시스템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어린 학생들이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주말리그도 창설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08년 ‘K리그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주말리그를 신설했고 이후 10여 년 세월을 거치며 유소년 저변 확대와 유망주 발굴 및 육성의 토대로 질적, 양적 발전을 이뤘다.

K리그1, K리그2 구단 산하 18세 이하(U-18), 15세 이하(U-15) 팀이 각각 22개 팀으로 나서 두 개 조에서 리그를 진행하는 시스템. 종전엔 대부분 초·중·고등학교에서 고학년 선수들에게만 출전 기회가 돌아갔는데 2017년 저학년 리그인 ‘K리그 주니어 U-17', 2019년 U-15 리그와 함께 신설된 ’K리그 주니어 U-14’를 함께 운영하며 저학년 선수들도 충분한 경기 참가 기회를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이와 함께 K리그 프로 산하 유소년팀이 모두 참가하는 K리그 유스 챔피언십도 함께 진행해오고 있다. 유스 챔피언십에선 선수 보호를 위해 전 경기 야간 경기를 실시하고 격일 경기 개최 등 선수들에게 프로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맹은 2018년부터 K리그에 U-22 의무출전 규정도 신설했다. 동시에 준 프로계약 제도를 도입해 어린 선수들의 빠른 프로 진출 발판을 마련했다. 

U-22 규정으로 인해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고 2021년 K리그 영플레이어상까지 수상한 울산 현대 설영우. [사진=스포츠Q DB]

 

이 규정은 출전 선수명단에 U-22 선수를 의무적으로 포함시키고 이들이 교체선수로 투입되거나 선발로 2명 이상 출장하면 팀에서 5명까지 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다. U-22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고 활용하지 않을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다. 이 때문에 어리고 유망한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고 있다.

지난해 초 연맹은 미디어 브리핑을 통해 “올해 U-22 활약이 눈에 띄는데 밑바탕에 준 프로계약 도입 효과가 있다”며 “한동안 10대 선수 데뷔 명맥이 끊겼었는데 올해 U-22 출전에 따른 교체 규정이 달라진 것과 결합해 유소년의 기량 향상과 구단들의 전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K리그 수원 삼성에서 6골 2도움을 기록, 대표팀에도 발탁됐던 정상빈이 대표적이다. 2020년 준 프로선수로 등록한 뒤 지난해 급격히 성장한 그는 시즌을 마친 뒤 초단기 해외 진출 사례를 만들어냈다. 지난해 영플레이어상 주인공 설영우(24)와 ‘엄살라’ 엄원상(23·이상 울산 현대), 김태환(22·수원 삼성), 엄지성(20·광주FC), 이태석, 이한범(이상 20·FC서울) 등도 U-22 의무출전 규정과 함께 힘차게 날아오른 선수들이다.

◆ 골든에이지, 우리도 축구 선진국처럼

대한축구협회(KFA)에서 진행하고 있는 골든에이지도 빼놓을 수 없다. K리그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유스시스템이 현재를 말해준다면 골든에이지는 더 밝은 미래를 기약케 한다.

골든에이지 훈련 중인 한국 축구의 미래가 될 선수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2014년 상비군 제도를 개편해 골든에이지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으로 21개 지역센터, 5개 지역광역센터와 합동광역센터, KFA 센터의 3단계 시스템으로 폭 넓게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고 있다. 특히 합동광역센터와 KFA 센터는 협회가 직접 전담하며 집중 육성에 힘쓰고 있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축구 강국 유소년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한국 실정에 맞게 개발한 축구협회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이다. 프리골든에이지(U-6~U-11)와 골든에이지(U-12~U-15), 포스트골든에이지(U-16~U-19) 등 단계적으로 운영한다. 축구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술 습득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는 골든에이지 연령대를 중심으로 축구를 통한 즐거움 제공, 연령에 맞는 세분화된 훈련을 통해 개별적인 선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소년 역량 데이터 측정 및 관리 시스템인 ‘골든패스’를 통해 골든에이지 선수들의 역량을 측정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수선수 발굴 및 관리로 미래의 국가대표를 집중 육성하는 게 목표다. 어릴 때부터 신체적이나 심리적인 개개인의 특성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시스템에서 길러진 선수들이 정상빈, 엄지성, 이한범, 이태석 등 2002년생 선수들이다. 골든에이지 1세대인 이들은 2019년 국제축구연맹(FIFA) U-17 브라질월드컵에서 8강 진출을 합작했다. 이러한 토대 속 이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출전 선수 21명 중 2002년생이 17명이었는데, 14명이 프로에 직행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골든에이지 1세대 엄지성(왼쪽)은 A대표팀에도 합류해 데뷔골까지 터뜨리며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당장 눈에 띄지 않더라도 성인이 되면 활약할 수 있을 만한 선수를 찾아내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KFA 조준헌 축구인재육성팀 팀장은 “골든에이지서 강조하는 건 누가 보더라도 잘하는 선수뿐 아니라 당장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에도 주목한다는 것”이라며 “창의적이고 1대1에 강하거나 저돌성을 갖춘 선수 등 전문가들만 볼 수 있는 지표에서 눈에 띄는 선수들 선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본 퓨처팀도 있다. 조 팀장은 “3년 전부터 퓨처팀도 운영하고 있는데 덩치가 작아 두각을 못 나타내는 선수들 중 기술적으로 훌륭한 자질이 있는 선수들을 따로 선발한다“며 “5,6년 앞까지 내다보고 심리적, 영양학적인 도움도 주며 성인이 될 시점에 잠재력을 폭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엔 극소수 선수들에게만 연령별 대표팀 태극마크가 주어졌는데 더 세분화해 지역, 광역 센터 등에서 관리하며 선수들에게 더 많은 동기부여를 던져주고 있다. 조 팀장은 “선수들이나 학부모들이 KFA 센터에 들어오려는 욕심이 크다”며 “자기 팀에선 잘하지만 여기 들어오면 비슷한 선수들과 경쟁하며 더 발전을 이루게 된다. 더 많은 선수들에게 꾸준히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망도 밝다. 골든에이지 1세대 선수들이 프로에 등장하자마자 주전급으로 활약하며 축구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선수들에겐 유럽 명문 클럽 유스팀에서 해외 경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인재 양성을 기대하고 있다.

아직은 부족한 점도 있다. 조 팀장은 “박지성처럼 어릴 때 두각을 못 나타내다가 늦게 꽃피는 선수들이 있지만 반대로 어릴 때 잘하다가도 나이가 들어가며 기대에 비해 성장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있다”며 “그런 것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하려고 한다. 단순히 축구에 대한 기술뿐 아니라 특히 요즘 강조되는 인성과 멘탈적인 부분의 케어를 더 강화하고 집중해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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