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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2325경기 '심판계 대부' 민준기, 심판의 지위를 드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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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2325경기 '심판계 대부' 민준기, 심판의 지위를 드높였다
  • 신석주 기자
  • 승인 2014.04.24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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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박물관 기증품을 통해 야구를 추억하다 <2>

[300자 Tip!] KBO 지하 1층 아카이브에는 야구의 추억을 담은 물품들이 계속해서 쌓여가며 소중한 야구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야구에서 ‘미친 존재감’을 선보이는 심판들의 역사도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야구박물관 준비팀이 동분서주하며 모아온 다양한 기증품 중에는 야구 심판에 관련한 물품도 상당수 있다. 그중 고 민준기 심판의 유품은 한국 야구심판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스포츠Q는 이상일 KBO 총재 특별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물품의 역사와 기증자들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스포츠Q 글 신석주·사진 노민규 기자] 심판은 야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미비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판은 야구를 알 수 있는 한 축이다. 심판계의 대부인 고 민준기 씨는 심판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심판일지와 심판 장비 등을 모두 기증했다.

▲ 고 민준기 씨는 자신이 직접 착용했던 심판 장비를 모두 기증해 장비의 변화를 쉽게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는 1950년~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심판 장비, 심판 교재, 각종 서류 등 460여 점을 생전에 야구박물관을 위해 내놓았다. 특히 심판 일지에는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처음 받은 수당 봉투부터 수당 일지, 출장비 내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가 22년 동안 심판을 하면서 거마비로 744만6200원을 받았다고 나와 있다.

그가 착용했던 심판 장비도 고스란히 기증했다. 이를 통해 심판 장비의 변화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 야구 역사를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선수들이 페넌트를 교환하는 데 민준기 심판은 그것도 빼놓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심판을 본 모든 대회의 팸플릿까지 꼼꼼하게 다 챙겨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심판이 천직’ 조용하고 꼼꼼했던 명판관

고 민준기 씨의 유품은 부인께서 모두 내놓았다. 당시 기증품을 받으러 갔던 이상일 특보는 “처음 애지중지하던 물품을 내놓기가 아쉬웠는지 상당히 오랫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박물관의 취지를 알고 고심 끝에 기증하기로 했다. 고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내놓기 어려웠을 텐데 큰 결정을 했다고 고마움을 표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이상일 특보는 ‘매우 조용했던 분’으로 민준기 씨를 기억했다. 이 특보는 ”우리나라 심판 중 국제경기를 가장 많이 치렀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심판계의 전설이지만 실제 만나봤을 때 매우 조용하고 차분했다. ‘심판이 천직이 아닐까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를 떠올렸다.

이 특보는 또 “그는 당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자신이 받은 거마비를 일일이 다 기록할 정도로 투명하고 청렴한 분이었다. 야구를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심판을 위해 산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 고 민준기 씨가 기증한 심판 일지에는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처음 받은 수당 봉투부터 수당 일지, 출장비 내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 고 민준기, 심판의 역사가 되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 민준기 심판은 1984년 쿠바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 구령을 마지막으로 22년 동안 썼던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야구 심판계의 대부로 불린다. 고 민준기 심판은 선수로서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대전고와 건국대를 거쳐 교통부(53~54년), 조선운수(56~57년), 철도청(63년)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다.

1962년 대한야구협회 심판강습회 1기 출신으로 철도청에서 선수 생활을 은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심판의 길로 접어들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관장했던 경기수만 해도 2325경기나 된다. 이중 주심은 1297경기, 1루심은 236경기, 2루심은 630경기, 3루심은 148경기, 선심은 14경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경기에 나서며 공정한 판정으로 덕망이 높았다. 1976년 제24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수심판상을, 1982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27회 세계선수권 대회서는 심판장을 맡는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명판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오로지 심판만 잘 본 것 때문에 심판계의 대부로 통한 것은 아니다. 그는 1982년 한국 최초로 심판아카데미를 설립하며 후배 양성과 심판들의 실력 증진과 지위 향상에 정성을 다했다.

▲ 고 민준기 씨가 사용했던 심판 장비에는 고인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고 민준기 씨는 심판만큼이나 소프트볼 육성에도 큰 힘을 쏟았다. 1984년 대한야구협회 전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국내 소프트볼 육성과 국제심판으로 활약했다.

이후 1986년 본격적으로 대한소프볼협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꾸려 소프트볼 양성에 박차를 가했고 협회를 창립한 1989년부터 10년 동안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아시아 및 세계연맹총회에서 한국대표를 역임하며 소프트볼 지위를 높이는 데 헌신했다.

고인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8월 세계소프트볼 서울총회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명 심판으로 활약하고 후배 양성에 힘을 쏟는 등 한국 야구에서 심판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 살아왔던 그는 2012년 7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취재후기] 심판들은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인정받기 쉽지 않고 비난의 화살은 가장 먼저 받는다. 때문에 22년 동안 2325경기를 도맡았던 고 민준기 씨의 활약이 더욱 빛나 보였다. 손때가 묻은 심판 장비와 심판일지에서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판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을 쏟았던 그의 뜻이 후배들에게 오래도록 전달되고 기억되길 바란다.

chic423@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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