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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2) 김홍집-김선진, "여전히 야구는 나의 인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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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2) 김홍집-김선진, "여전히 야구는 나의 인생"(下)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4.08.07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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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극과 극 인생 김홍집과 김선진

[스포츠Q 민기홍 기자] 팔이 부서지도록 던졌던 그 경기를 이겼다면 김홍집의 야구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반면 김선진은 ‘그 홈런’ 한방을 때려내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 대포는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김선진의 초구 변화구 공략은 결코 얻어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라운드보다 벤치가 더 익숙한 선수였지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박’ 결과로 나타났다.

◆ 삐걱대던 김선진의 롤러코스터, 한방으로 급상승 

“쿠세(투구 습관)라고 그러죠. 그 때도 전력분석이 있었으니까. 미세한 글러브 움직임 보고 슬라이더라는 걸 알았죠. 홈런을 노리지는 않았습니다.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했죠.”

‘그 홈런’ 한 방은 김선진의 인생을 바꿨다. 방출을 눈앞에 뒀던 그는 지도자는 물론 팬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김선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 김선진은 1994년 48경기에 출전해 1홈런 20안타 7타점을 기록했다. 그가 일을 냈다. [사진=KBSN스포츠 방송 화면 캡처]

야구팬들은 김선진을 1루수로 기억하겠지만 그의 본래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김선진은 광주일고-연세대를 거치며 주전 유격수 자리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허리와 어깨 부상을 입으며 1루로 포지션을 옮겼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결국 그는 고향팀 해태로부터 외면당했다. 삼성과 태평양에 입단할 기회를 물색했지만 또 쓴맛만 봤다. 1년간 무적 신세로 지내던 그에게 기회를 준 곳이 LG였다. 입단 테스트 끝에 1990년 계약금 1000만원에 가까스로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김선진은 첫 시즌 45경기에 나서 타율 0.344의 준수한 성적을 냈다. 준수한 활약으로 1991년에는 104경기나 나섰다. ‘미스터 LG’ 김상훈의 벽에 막혀 주전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대타와 1루 백업으로서의 효용 가치를 증명했다.

하지만 1992년부터 2년간 123경기 출전에 그치며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게 된다. 1993년 시즌 후에는 사실상 방출 대상자로 분류됐다. 다행히 구단 홍보팀 직원과 결혼이 예정돼 있어 프로생활을 1년 연장할 수 있었다.

▲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와 1루 LG팬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는 김선진. [사진=KBSN스포츠 방송 화면 캡처]

1994년이 돼서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나 그 해에는 프로야구에 돌풍을 몰고 온 슈퍼스타 서용빈의 등장으로 더욱 설 자리를 잃었다. 김선진은 겨우 48경기에 나섰을 뿐이었다. 어두운 터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 방, LG에 두 번째 우승을 가져다준 천금 결승포 이후 김선진은 팀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타율 0.294, 9홈런 39타점으로 활약했다. 1998년에는 서용빈의 부상을 틈타 시즌 내내 주전으로 경기를 뛰며 타율 0.282, 8홈런 46타점을 올렸다.

방출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김선진은 2000년까지 LG에서 뛰고 은퇴했다. 프로 11년간 올린 성적은 타율 0.258, 33홈런 177타점이다. 포스트시즌 홈런 하나가 1994년 한국시리즈 기록이었다.

그는 “방출 위기에 놓였던 내가 현역 생활을 더 연장할 수 있었던 홈런”이라고 인정하며 “승부의 세계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김홍집이 본의 아니게 내 홈런으로 인해 후유증이 많이 남았을 것이다”며 후배를 향한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 야구는 여전히 나의 인생

“2003년 은퇴하고 2년간 이일저일 해봤어요. 야구만 했으니 뭘 알았겠어요. 사람 겪으며 인생 공부 한 셈이죠. 부동산, 술집 등을 해보면서 사기도 당할 뻔 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인천고 감독님이 재능 썩히지 말라며 부르시더라고요.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습니다.”

▲ 김홍집은 6년전 인천 부평구 리틀야구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1년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차출된 김홍집 감독. [사진=김홍집 제공]

우여곡절 끝에 김홍집은 다시 야구공을 잡았다. 그는 현재 인천 부평구 리틀야구팀을 맡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부임해 어느덧 6년째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 진학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고 있다.

김 감독은 “우리 때는 매 맞아가며 오로지 야구만 했다. 그런 악습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공부와 병행하며 할 수 있는 야구, 자유분방한 야구, 재밌는 야구를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야구장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팀이 사용하던 야구장이 폐쇄되며 졸지에 운동할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김 감독은 “여러 방법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공간 확보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김선진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야구계로 돌아왔다.

그는 2000년 은퇴 후 서울 중대부속초와 성남 성일중 감독을 지냈다. 2005년 고향인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자동차 충전소, 체육용품 사업 등을 하면서 그라운드 복귀를 꿈꿨다.

2012년 고등학교 후배인 김기태 전 감독이 LG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12년만에 타격 코치로 다시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1군과 2군을 오가다 현재는 퓨처스리그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김 코치는 “친정 LG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을 가르치니 더욱 애정이 간다”며 “최근 2군에서 올라가 맹활약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보람있고 뿌듯하다”고 기뻐했다. 이어 “퓨처스리그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 많은 관심을 갖고 애정있게 지켜봐달라”고 주문했다.

▲ 지난 1월 애리조나 전지훈련 당시 임재철(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선진 코치. [사진=LG 트윈스 제공]

[취재 후기] 20년이 지났지만 둘은 그 때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스포츠팬인 기자도 그날만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선물해준 그들에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움을 느낀다. 리틀과 2군 지도자로 야구계의 초석을 다지고 있는 두 사람의 앞길을 응원한다. 33번째 가을야구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또 어떤 명승부가 야구팬들을 웃고 울릴지 자못 기대가 크다.

sportsfactory@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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