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큐) 원호성 기자]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를 배경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한 의열단 단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은 그간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영화 중 단연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밀정'은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경찰이 된 친일파 이정출(송강호 분)이 의열단의 핵심인물인 김장옥(박희순 분)을 체포하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의열단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 부자의 집을 찾았던 김장옥은 함정에 빠져 일본 헌병대에 포위를 당하고, 지금은 일본경찰이지만 과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장옥과 친구 사이였던 이정출은 김장옥을 사살하려는 일본경찰들을 막아서며 거듭 투항을 권유한다.
하지만 김장옥은 끝내 투항을 거부하고 자살하고, 이정출은 상부의 명을 받고 조선에 남은 의열단 세력의 중심인물로 추정되는 김우진(공유 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지난해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암살'과 '밀정'은 비슷한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항일(抗日)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암살'과 '밀정'은 같은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이자, 두 영화 모두 영화를 위해 창작된 픽션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실제 사건과 인물들에 충분한 근거를 두고 있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1932년 발생한 일본 육군대장 우가키 카즈시게에 대한 암살작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고, '밀정'은 1923년 벌어진 의열단의 종로경찰서 폭탄테러사건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암살'은 실제 사건을 영화적으로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에 비중을 둔다. 그래서 '암살'은 영화 내내 암살사건을 성사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액션 블록버스터다운 오락적 재미에 충실하려고 한다.
반면 '밀정'은 조선에 폭탄을 잠입시켜 폭탄테러를 한다는 사건의 전개에 치중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비중은 오롯이 인물들, 그 중에서도 적인지 동지인지 끝까지 알기 힘든 김우진(공유 분)과 이정출(송강호 분)의 관계에 이야기의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밀정'은 '암살'보다 더욱 내밀하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충실하게 들여다본다.
'밀정'은 그동안 김지운 감독이 장르영화 전문 감독으로서 다져온 내공이 드디어 터져나온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달빛 아래의 김장옥 추격전은 한 편의 무협영화를 보는 듯 우아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시작부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이정출과 김우진의 관계를 중심으로, 뼛속까지 친일파인 하시모토(엄태구 분)와 역시 속내를 알기 힘들지만 겉으로는 호인의 모습으로 이정출에게 접근하는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분)과 여성의 몸으로 의열단에 투신해 사랑보다 조국을 택한 연계순(한지민 분) 등 인물들의 심리를 세세하면서도 품격있게 그려낸다. 앞서 만주 웨스턴(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호러(장화, 홍련)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온 김지운 감독이 느와르, 그것도 인물들의 뜨거운 감정이 쉬이 내비쳐지지 않는 '콜드 느와르'라는 장르를 완벽하게 이해한 완성도 높고 격조 있는 연출이다.
하지만 '밀정'에서 김지운 감독은 묵직한 무게감과 품격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나머지 뜨거워져야 할 부분에서 쉬이 뜨거워지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정출과 김우진이 만나는 대목까지의 이야기는 흠결 하나 잡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지만, 정작 이정출과 김우진이 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야기의 방향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아쉬움이 '밀정'의 중심인 이정출의 심리에 대한 부분이다. 이정출은 자신보다 훨씬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하시모토로 인해 일본경찰의 실세에서 밀려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정출은 다시 자신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의열단과 접촉을 시도해 밀정이 되고자 하나 이번에는 의열단이 주장하는 정의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일본경찰의 밀정으로 의열단에 접근했지만 오히려 이제는 그가 일본경찰에 잠입한 의열단의 '이중간첩'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밀정'이 아쉬운 것은 이 과정에서 이정출이 어떤 계기로, 또는 어떤 심리로 의열단의 대의에 동조하게 되는지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정출을 연기한 송강호는 이에 대해 "오히려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정출이 변심했다고 한다면 영화의 스케일이 지나치게 작아졌을 것"이라며 김지운 감독의 선택을 옹호했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정출이 의열단과 일본경찰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택을 바로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처럼, 관객들 역시 이정출이 어떤 계기로 의열단과 일본경찰 중 하나를 선택하는지 영화를 보고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굳이 억지로 이해를 한다면 '조선인이니까'라는 민족적인 대의명분이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밀정'의 이런 아쉬움은 이 영화가 국내 자본이 아닌 할리우드의 자본(워너브라더스)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도 이유가 될 지 모른다. 국내 자본으로 만든 영화라면 '애국심'이라는 코드를 영화의 전면에 내세워 인물들의 행적과 가슴을 보다 뜨겁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워너브라더스가 투자한 '밀정'은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닌 콜드 느와르의 길을 택하며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표출을 억누르며 항일이라는 뜨거운 가치를 이야기한다.
언제나 뜨겁고 치열하게만 그려지던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회색의 인물들을 내세워 차갑고 건조하게 그려낸 김지운 감독의 선택은 훌륭했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무릇 뜨거워져야 할 때는 뜨거워져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밀정'은 뜨거운 열기는 인물들의 가슴에 묻은 채 차가운 감정으로 뜨거운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 극심한 온도차는 '밀정'의 외적인 완성도가 근래 한국영화 중 단연 최고라는 사실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완전히 동조하기 힘든 이상한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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