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년 10월 18일~12월 28일)’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 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다. 여기에 K리그는 물론 배구 슈퍼리그가 스포츠팬들의 시선을 집중케 했다.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300자 Tip!]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유난히 구기종목의 선전에 모든 스포츠팬들이 환호했다. 특히 구기종목들은 오래간만에 금메달을 딴 사례가 많았다. 남자축구는 1986년 서울 대회 이후 28년만에 우승했고 남자농구는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12년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종목, 여자배구는 1994년 히로시마 대회 이후 20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금메달의 주역은 어느덧 40대 중년이 되어 후배들이 금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지금 김연경(26·페네르바체)이 있었던 것처럼 당시에도 부동의 왼쪽 공격수가 있었다. 배구 선수로는 170cm로 작은 키지만 높은 점프력과 빠른 스피드로 일본과 중국의 높이를 이겨내고 날카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당시 '짱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장윤희(44)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이다.
[용인=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노민규 기자] "제가 해설위원으로 그랑프리와 아시아배구연맹(AVC)컵까지 모두 따라다녔잖아요. 후배들이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되겠다 싶었죠. 그리고 일본과 중국이 세계선수권에 치중하느라 주전들을 많이 내보내지 않은 것도 맞물렸죠. 역시 잘해주더군요."
여자배구가 20년만에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장윤희 해설위원은 아직까지 흥분과 기쁨이 가시지 않은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배구가 두번째 따낸 금메달이었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가 바로 장윤희 위원이 현역으로 뛰었던 1994년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여자배구는 일본과 중국의 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국이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기 전까지는 늘 일본에 이어 은메달을 땄고, 중국이 들어오자 동메달로 밀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4년에서야 첫 금메달을 땄다.
바로 그 중심에 장윤희가 있었다.
전주 근영여고를 1989년에 졸업한 그는 1988년 말 가등록 형식으로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 입단해 뛰었다. 당시만 해도 장윤희의 등장은 '센세이션'이었다.
당시 한 신문은 '나는 작은 새' 조혜정(61)을 연상시키는 뛰어난 신인이 발굴됐다며 흥분했다. 170cm의 그리 크지 않은 키지만 뛰어난 점프력으로 상대 블로킹을 따돌리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팀을 이끌었던 김철용 감독도 "여태껏 내가 봤던 선수 가운데 가장 몸이 빠르다"며 찬사를 보냈다.
◆ 무적 호남정유와 아시안게임 대표팀의 닮은 점
1990년대 여자실업배구 호남정유는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1991년 대통령배대회를 시작으로 1995년까지 무려 92연승을 달렸다. 1995년 1월 4일 열린 4연패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선경에게 덜미를 잡힌 것. 당시 호남정유의 패배는 스포츠면 톱기사였을 정도였다.
무적 호남정유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공통 분모가 있다. 바로 김철용 감독과 장윤희였다.
"당시 호남정유나 대표팀 모두 지금 삼성화재와 비슷한 것 같아요. 훈련을 할 때도 언제나 긴장감이 흐르고 다른 팀보다 훈련량도 많았죠. 게다가 선수 개개인만 놓고 상대팀과 비교하면 약해보이는데 팀으로 놓고 보면 강하다는 것도 공통점인 것 같아요."
장윤희가 당시 호남정유는 뛰어난 스타급 선수는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김철용 감독은 선수들을 하나로 묶어 시너지 효과를 내는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것이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까지 이어졌다.
"대표팀에서도 스파르타 훈련은 이어졌죠. 당시도 중국이 최강이었을 때였죠. 체격조건이 불리한 우리가 라이벌 일본과 중국을 모두 넘어서려면 훈련 외엔 없었어요. 키가 큰 선수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발 빠른 스피드와 견고한 조직력이 있어야 했어요."
장윤희는 1990년부터 1998년 대회까지 모두 세 차례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이 가운데 최고의 멤버와 최고의 대표팀을 꼽으라면 역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를 꼽는다.
"모두가 우승하려고 똘똘 뭉쳐있을 때였죠. 그 때 각오나 이런 것은 인천 아시안게임을 뛴 후배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그만큼 우승이 절실했죠. 그 결과 당시 대표팀이 일본을 넘어서는 정도가 됐죠. 1993년인가,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에 한 번 진 이후로 계속 이겼으니까요."
◆ 중국과 일본 넘어 첫 금메달 따기까지
운명의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과 두번째 만났다. 풀리그로 벌어졌던 당시 일정에서 일본은 금메달을 놓고 다툴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전을 마지막 경기로 짜놓았다. 이 때문에 한국은 중국과 두번째 경기에서 만났다.
"당시 중국 선수도 키가 컸어요. 센터가 190cm가 넘었고 레프트와 라이트 공격수도 180cm나 됐으니까요. 이런 팀이 단순히 키만 갖고 경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공격도 하는 등 팀플레이를 하니까 어려웠죠. 우리는 키가 작다보니 중국을 넘어서기가 어려웠어요."
당시 한국은 중국과 만나면 0-3 또는 1-3으로 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의외로 첫 세트와 3세트를 이기면서 2-1로 앞서나갔다. 그런데 4세트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힘없이 내주면서 코너에 몰렸다.
"다시 정신이 번쩍 들어 5세트에서 듀스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죠. 계속 대등한 경기를 하다가 마지막 정선혜가 공격을 성공시켜 21-19로 이겼어요. 랠리가 계속 되다가 정선혜가 순간적으로 페인트 공격을 한 것이 중국 선수가 받아내지 못했죠. 경기가 끝나는 순간 한동안 멍했어요. 아시아 최강이었기에 우리가 과연 중국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믿겨지지 않았어요. '우리가 정말 이겼나?'하는 생각뿐이었죠."
문제는 일본전이었다. 일본만 이기면 사실상 우승이었다. 그런데 1, 2세트를 연달아 내주면서 코너에 몰렸다. 두 세트를 내리 내주자 사기는 땅까지 떨어졌다.
"3세트는 반 포기 상태였어요. 포기했기에 마음을 비운 것이 오히려 효과를 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도 마음을 놓고 하다가 실수가 연달아 나오면서 자멸했죠."
3세트를 15-3으로 따내면서 기사회생한 한국은 4세트가 되자 김철용 감독으로부터 '이렇게 됐는데 포기할거냐'는 말을 들었다. 격앙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3세트를 이기면서 자신감까지 얻었다. 그렇게 4세트를 15-10으로 따냈고 5세트로 넘어갔다.
"일본과 접전을 벌이다가 정선혜가 서브에이스를 넣으면서 분위기를 잡았죠. 일본도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칠 위기에 몰리니까 당황해서 실수가 나왔고요. 결국 마지막 점수를 제가 따내면서 극적인 역전승이 완성됐죠. 세터를 봤던 (이)도희 언니의 사인도 완벽했고 호흡도 잘 맞았어요. 저도 공 하나에 모든 것을 건다는 마음으로 이동공격을 펼쳤죠. 미리 얘기하고 작전을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눈빛과 서로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공격이었어요."
일본에 두 세트를 내주고 세 세트를 내리 따낸 대역전극으로 한국은 사실상 우승을 확정했다. 한국은 그 다음날 대만을 상대로 단 14점만 내주고 세트스코어 3-0으로 이기면서 환호성을 올렸다. 한국과 대만 경기 다음에 벌어진 일본과 중국 경기는 은메달 결정전으로 격하(?)됐다.
◆ 인천 아시안게임, 히로시마의 데자뷔
장윤희 위원은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모습이 히로시마 때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직력을 바탕으로 똘똘 뭉친 것 하나만큼은 히로시마 때 못지 않다고 밝혔다.
"팀워크에서는 히로시마 때가 더 낫긴 했지만 후배들도 조직력이 좋았어요. 게다가 이번 대표팀에는 김연경이라는 스타가 있었잖아요. 하지만 김연경이 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김연경은 어느 대회를 나가도 역할이 크지만 결국 해줘야 하는 것은 다른 선수들이거든요. 이전 대회는 다른 선수들의 역할이 1%씩 부족했다면 이번에는 김희진(23)이나 박정아(21·이상 IBK기업은행)가 잘해줬죠. 김희진 같은 경우는 김연경을 능가하려고 노력하는 선수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 드래프트 1, 2순위로 뽑힌 쌍둥이 이재영(18·흥국생명)과 이다영(현대건설)도 이번 대표팀을 통해서 더욱 부쩍 성장하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특히 장윤희 위원은 김연경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경이 정도 되는 스타급이라면 조금 스타의식이 있을 법도 한데 항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주위의 모든 조언을 자기 것으로 만들죠. 그런 것이 프로에 와서 더욱 성장하고 최고의 선수가 된 원동력인 것 같아요. 선배들의 얘기와 조언을 모두 잘 받아들이니까 선배들 입장에서는 연경이가 예뻐보일 수밖에 없죠. 연경이 같은 선수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번 대표팀을 보니까 연경이와 비슷한 선수가 바로 이재영과 이다영인 것 같아요. 이미 경력이나 경험에서는 같은 나이 또래 선수들을 넘어섰고 신체조건도 좋은데 역시 조언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좋은 지도자를 만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있으니 프로에서도 기대가 되는 선수죠."
◆ 잃어버린 20년, 답답한 배구 현실
하지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한국 여자배구는 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20년이 걸렸다. 특히 장윤희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대형 공격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2005년부터 V리그가 출범하면서 프로화가 됐지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태국에 덜미를 잡히는 믿어지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다.
"프로가 되고 나서 외국인 선수가 대부분 공격을 담당하다보니 우리 선수들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고 봐야죠. 팀 성적이 우선이니까 외국인 선수에게 마무리 공격을 맡길 수밖에 없고 결국 우리 선수들은 국내에서 자신있는 공격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국제대회에서는 조심스러운 공격을 하게 되고 결국 침체됐던거죠."
여기에 장윤희 위원은 여자배구의 근간이 되어야 할 학교에서 제대로 선수를 키워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한다.
"프로배구도 발전해야겠지만 결국 밑이 더 탄탄해야 발전할 수 있지 않겠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팀이 운영되고 있는데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예산 문제 없는 학교가 얼마 되지 않아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죠. 특히 한자녀 가정이 많아지다보니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지 않아요. 그러니 선수가 없어 팀을 구성하기도 힘들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들면 안하려 하죠. 결국 지도자들은 선수들을 찾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장윤희 위원은 어렸을 때부터 너무 성적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을 올리기 위해 선수들을 가르치다보면 기량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어요. 키가 클 선수도 혹사당하다보니 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죠. 제 생각에는 초등학교 때는 여러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김연경이 지금과 같은 대형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여러 포지션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예요. 김연경은 중학교 때만 하더라도 키가 작아서 세터를 보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키가 커지면서 공격수로 나간거죠. 처음부터 공격수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포지션을 경험하면서 공격과 수비 능력을 동시에 갖추다보니 큰 선수가 된거예요."
장윤희 위원이 또 하나 답답해하는 것은 비치발리볼의 현실이다.
그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비치발리볼 선수로 나갔다. 전문 비치발리볼 선수가 아니라 은퇴한 선수로 팀을 구성해 나간 것이었다.
"부산 아시안게임이나 지금이나 12년이 지났는데 변한 것이 없어요. 은퇴한 선수들을 모아서 단발성으로 대회에 나가는게 전부예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경험이긴 했지만 고작 3개월 훈련해서 나간 것이었죠. 다른 팀들은 모두 2, 3년 훈련해서 나왔는데 솔직히 창피했어요. 아마 팬들 입장에서는 한때 대표팀 선수였는데 다른 팀들에게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지는 모습에 어이없어 했을 거예요. 그러나 코트와 모래는 엄연히 다르죠."
이에 대해 장윤희 위원은 비치발리볼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팀부터 만들어 선수들을 끌어모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회가 열릴 때마다 선수들을 모아서 단발성으로 출전하는 일이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협회에서도 하려고 하지만 선수가 없다고 해요. 저는 그럴 때마다 팀을 먼저 만들어달라고 하죠. 선수는 얼마든지 있어요. 드래프트에서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들이 비치발리볼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도 있죠."
오는 18일이면 드디어 2014~2015 V리그가 시작된다. 장윤희 위원 역시 이제 해설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박미희(51) 선배가 해설위원을 하다가 이번에 흥국생명 감독으로 갔잖아요. 저도 역시 감독이 되고 싶어요. 기왕이면 GS칼텍스가 좋겠죠. 제가 뼈를 묻었고 코치도 했었던데다가 애정이 있는 팀이니까요. 그런데 쉰 중반이 되어서 처음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5년 이내에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해설위원으로서 앞으로 현장 경험을 많이 쌓아야겠죠."
[취재후기] 여자배구는 그동안 조혜정, 장윤희, 김연경 등 '불세출의 스타'의 활약으로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공교롭게도 조혜정과 장윤희 그리고 장윤희와 김연경의 나이차가 거의 비슷하다. 17년 또는 18년 차이가 난다. 그 나이차만큼 한국 여자배구는 영광 뒤에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배구가 해야할 일은 김연경과 그 이후에 나올 기대주, 유망주들의 나이차를 줄이는 것이 아닐까. 이미 김희진이나 박정아가 활약해주고 있고 이재영, 이다영이 쑥쑥 자라고 있기에 당분간 미래는 밝겠지만 연속성을 위해서는 꾸준히 좋은 선수들이 발굴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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