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이해준(42) 감독은 원래 충무로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였다. 2000년 단편영화 ‘커밍아웃’부터 주목받기 시작해 ‘신라의 달밤’ ‘품행제로’ ‘안녕 UFO’ ‘아라한 장풍대작전’ ‘남극일기’ 등 히트작을 연이어 내놓았다. 2006년 ‘천하장사 마돈나’부터 각본과 연출을 맡으며 감독 데뷔했다. ‘김씨표류기’에 이은 세 번째 연출작 ‘나의 독재자’가 10월30일 개봉됐다.
첫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에 김일성 대역으로 캐스팅된 무명의 연극배우 성근(설경구)은 배역에 빠져버려 스스로를 김일성이라 믿고,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뒤틀려버린 아들 태식(박해일)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은 채 양아치처럼 살아간다. 관객과 평단은 1972년과 94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특별한 부자(父子) 서사에 핏발 선 눈길을 보내고 있다.
-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역할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오는 게 직업인 배우의 인생, 분단과 독재정치와 같은 한반도 정치현실 등 여러 결로 읽힐 수 있다. 설경구 배우는 “부자의 이야기”라고 강조하더라.
▲ 아버지와 아들 얘기가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무대에 서왔던 배우도 아니고, 스스로를 김일성이라고 믿고는 있으나 김일성에 체화된 배우도 아닌데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면서 ‘왜 아버지가 생각나지’란 반응이 나올 만큼 보편적 이야기로 풀어야 했다. 경구 형은 배우라서 ‘배우의 이야기’라고 언급하는 걸 쑥스러워하는 것 같다. 극중 배우의 연기를 하니까 배우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고, 말하지 않아도 묻어나지 않을까.
- 70년대와 90년대가 등장한다. 시대적 장치를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시대와 정치상황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70년대를 살아갔던 아버지(설경구)와 90년대를 산 아버지(박해일)는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두 세대가 충돌할 것인가에 관심이 갔고 궁금했다. 70년대는 소위 산업화를 겪으면서 많은 이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던 시대였고, 그 열매를 따먹는 중요한 시기가 90년대다. 이때 ‘X세대’ ‘오렌지족’이란 단어도 나왔다. 태식도 그런 인물이지 않을까. 각기 다르게 두 세대, 시대를 나눠서 표현해보고 싶었다.
- '나의 독재자’는 이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렇기도 하지만.
▲ 내게도 아버지는 독재자 같은 분이셨다. 그래서 ‘독재자’가 아니라 ‘나의 독재자’라는 제목을 붙이게 됐다. 여전히 독재자인데 나의 독재자... 아버지는 자기 울분이 가득했고, 상처도 많으셨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화는 있으시지만 점차 기력을 잃어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많이 생기게 되더라.
- '천하장사 마돈나’ 때 여자가 되고 싶은 사춘기 소년 동구(류덕환)와 아버지(김윤석)의 관계가 일부 등장하다가 이번엔 전면화된 느낌이다. 동구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퍼컷을 날릴 정도로 무서웠다. ‘나의 독재자’의 아버지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 의도했던 건 아닌데 그때만 해도 난 동구처럼 젊었고, 젊은 만큼 아버지로 인한 상처에 더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 태식은 동구보다 나이가 더 들었고, 그런 시선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따스하게. 2007년 신문에서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역 배우가 있었다’는 기사를 보고는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선뜻 진행하질 못했다. 계획을 잡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3~4년 전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부터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싶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로는 잘 못하겠으니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워낙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설경구와 박해일의 연기가 눈부시다.
▲ 관객 입장에서 다시 한번 봐도 두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자기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감독이 연출을 잘한 영화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좋았다. 내가 다 만든 게 아니라 배우들이 잘 해줬다. 특히 경구 형은 내게 여러 조언을 해줬다. 회담 리허설을 기획하는 중앙정보부 오계장 역의 윤제문 배우의 경우 세월이 흘러 90년대 장관의 모습에서 크게 늙지 않은 설정을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오계장이 안 늙었으면 좋겠어. 어제의 인물처럼 다가왔으면 좋겠다. 권력이 어디 늙는 거 봤냐”란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대통령을 보더라도 권좌에서 내려오면 금방 늙듯이.
- 94년 성근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남북정상회담 리허설 장면부터 시작해 이어지는 ‘리어왕’ 독백 신은 압권이다.
▲ 마지막 회담 신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거기서 아버지의 연기가 어색해지면 그동안 끌어왔던 이야기가 무색해져버리니까 나와 경두 형 모두 초긴장하면서 찍었다. 독백 장면은 6차례의 테이크가 갔다. 3번째 테이크를 가는데 형이 “아닌 거 같다”고 말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러더니 “그날, 옛날 생각해보자”란 말을 하더라. 그 말이 탁 와닿았다. 4, 5, 6번째 테이크에서 명연기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감정 하나만 보고 연기 하는 사람이구나, 계획해서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구나”란 경외감이 들었다. ‘옛날 생각해보자’ 하나만 붙들고서 어떻게 저리 다른 연기가 나올까, “그래서 설경구구나” 했다.
- 성근의 죽음 이후 태식이 마루 밑에 잘 보관된 자신의 어린 시절 딱지를 발견하고 오열하는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 딱지 장면을 찍으면서 해일씨가 고생을 많이 했다. 감정연기를 열 테이크 이상 갔으니까. 나중엔 녹초가 됐다. 그런데 정말 애처럼 울더라.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순간 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감정이 돼버린 거다.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숙연해졌다. 눈이 퉁퉁 부어서 다음 촬영을 진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촬영 때 숙소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그날은 “아이가 보고 싶어서 서울에 가야겠다”고 해서 너무 짠했다.
- 설경구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역도산’ ‘강철중: 공공의 적’에 이은 기념비적인 필모그래피를 만들어낸 것 같다.
▲ 모진 고문을 받고 나온 뒤 아이한테 주기 위해 통닭을 사가지고 집에 왔을 때 우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밥 먹었어? 똥은 쌌어? 다 괜찮아”라는 대사는 그의 애드리브였다. 순간 확 젖어들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만난 어린 아들한테 아비가 밥 잘 먹고, 똥 잘 싸는 거 외에 바랄 게 뭐가 있겠나.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대사는 못 쓰겠구나 싶었다. 아버지이면서 배우인 설경구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영화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소속사에서 데뷔 20주년 행사를 치러줬을 때 난 “오아시스 자유롭고 역도산처럼 강렬하게”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전에 했던 어떤 연기도 기대하지 말라”며 “앞으로 또 다른 20년의 첫 영화가 이거다”라고 말했다. 다시 한다는 느낌으로 접근하고 싶어했다. 훌륭한 배우와 영화를 하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이번에 영감과 자극을 많이 얻었다.
- 옥에 티같이 느껴졌던 부분이 있다. 고문실 장면에서 시대적 배경이 70년대인데 주체사상에 빠진 서울대 국문과 학생이 등장한다. 국내 대학가에 주사파의 등장은 80년대 이후 아닌가.
▲ 북한에 주체사상은 60년대부터 존재했으니까 남한에도 북한의 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암암리에 있지 않았을까 여겼다. 시대감이 안 맞더라도 굳이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고, 관객에게 쉽게 규정될 수 있는 단어라면 쓰자 했다. 괴물에 맞서려다 보니 본인이 괴물이 돼가는 게 아니었을까 혹은 완전히 반대로 괴물 같은 사상을 믿게 하는 시대가 잉태한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라고 판단했다.
- 당신에 대해 기발한 착상과 독특한 소재에 능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많이 한다.
▲ 일부러 독특하려고 뭘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좀 삐툴게 사나...이유는 잘 모르겠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평소에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를 우연히 보며 꿈 같다거나 일상 속에서 비일상적인, 초현실주의적인 감흥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게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 앞으로 영화작업 계획을 들려달라.
▲ 그동안 작품 사이의 텀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다양한 영화를 좋아하고, 해보고 싶고, 관심도 많으니까 앞으론 자주 그리고 빨리 영화작업을 하고 싶다. 차기작은 장르영화를 구상 중이다. 시나리오 3고까진 나와 있으니 내년엔 꼭 촬영에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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