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자 Tip!] 여자배구 리베로들에게 경계령이 떨어졌다. 힘이 실린 문정원(22·한국도로공사)의 날카로운 서브 때문이다. 호리호리해보이는 이 왼손잡이 선수는 외국인 선수에 버금가는 ‘파워서브’로 리베로와 수비형 레프트들을 떨게 만들고 있다. 올시즌 전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반환점을 돌아 새해 달력으로 바꿔단 현재 문정원은 V리그의 가장 핫한 선수로 떠올랐다. 무명의 시련과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를 만나 '서브 여왕'으로 도약하기까지의 스토리를 들었다.
[성남=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이상민 기자] 한국도로공사 홍보팀 직원은 문정원을 ‘문대세’라 칭했다.
정답이다. 2014~2015 NH농협 V리그 여자부 최고의 ‘깜짝스타’는 누가 보더라도 문정원이다. 누구도 지난 3년간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 선수의 도약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젠 문정원이 서브만 넣어도 화제가 된다.
방송 인터뷰를 통해 본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카메라와 마이크가 익숙하지 않았을 터. 험난한 인터뷰를 예상했지만 이젠 어떤 질문에도 능란하게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게 됐다. “그 땐 처음이라 그랬다”고 되받아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팬들로부터 예쁘다는 소리가 많이 나온다”란 신년 덕담을 던지자 “배구를 잘 하다보니 예뻐보이는 것”이라며 “내가 예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친다.
경기도 성남 수정구에 자리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배구단 연습구장에서 대세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 V리그 출전도 생각 못했던 무명의 반란
“주전은커녕 (코트에)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3년차 때까지 원포인트로 기회는 곧잘 받았지만 부응을 못했거든요. 게임을 못 뛰니까 목표 의식도 사라지고... 울기도 많이 울었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딱 1년만 더 해보자 마음먹었는데 이렇게 됐네요.”
문정원은 목포여상을 졸업하고 2011-2012 시즌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4순위로 도로공사 유니폼을 입었다. 공격수 치고 작은 174cm의 신장이지만 여자 배구에서 씨가 말라가는 왼손잡이인데다 서전트 점프가 57cm나 될만큼 체공력이 좋아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의 벽은 높았다. 일단 라이트는 외국인의 전유물이었다. 표승주(GS칼텍스)도 넘지 못했다. 지난 시즌까지 문정원의 기록은 정규리그 17경기 9득점, 국내 선수들끼리만 겨루는 한국배구연맹(KOVO)컵 대회 기록은 2년간 4경기 6세트 2득점이다.
프로 입단 4시즌째.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서는 “네 서브는 넣기만 해도 상대 리시브 라인이 흔들린다”고 그를 격려했다. 문정원은 “정말 후회 없이 노력했다. 대가가 없다면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고 시즌 준비 과정을 돌아봤다.
지난 7월 안산에서 열린 KOVO컵에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조별리그 2경기와 준결승전 3경기에 나서 팀내에서 가장 많은 44점을 올리며 이름을 알렸다. 정규시즌이 개막하면 다시 벤치로 돌아가겠지만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됐다.
◆ 리시브 라인 ‘공공의 적’, 강서브의 비결은
2014년 11월 8일은 문정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창단 첫 우승을 위해 야심차게 돛을 올렸던 한국도로공사는 흥국생명과 GS칼텍스에 연달아 덜미를 잡히며 최하위로 시즌을 출발했다. 서남원 감독은 고심 끝에 문정원을 선발로 기용하는 강수를 뒀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문정원의 춤추는 스파이크 서브에 5개 구단 리시브 라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체중을 잔뜩 실어 날리는 그의 날카로운 강타에 한국도로공사는 팀명처럼 ‘하이패스’ 질주를 시작했다. 문정원의 주전 도약 후 도로공사는 10승4패를 기록하고 있다.
강서브의 비결은 남다른 도움닫기와 백목화(KGC인삼공사)다.
문정원은 초등학교 시절 육상으로 운동에 입문했다. 단거리(100m, 200m) 선수였던 그는 도약부터 유달리 빨라 체중을 오롯이 실을 수 있다. 중고교 선배 백목화의 노하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송원여중 재학 시절 단신임에도 강한 서브를 넣는 언니를 보고 연구를 거듭했다.
세트당 평균 0.67개로 폴리(현대건설)에 이어 서브 2위를 달리고 있지만 그는 “다른 팀들이 아직 내 서브 궤도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며 “다른 팀들이 전력 분석을 마쳤을 것이다. 곧 리시브를 해낼 것”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서브 넣을 때는 흔들어야지 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에이스해야지 하고 때리면 다 나가요. 하하.”
◆ 작으면 어떠랴, 배움을 즐기는 여자
“키 작은거요? 장신들은 발목 점프면 하면 되지만 저는 풀 점프를 해야 하니까 힘든 건 있죠. 대신 빠르잖아요. 점프 훈련을 무지 많이 했어요. 우리 팀에 좋은 선수들이 많아요. 각자 장점들을 지켜보면서 제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어요.”
문정원은 작은 신장이나 왼손잡이로 레프트를 소화해야 하는 상황을 결코 핸디캡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체적인 한계로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들은 훈련을 통해 메우면 된다. 왼손 각이 작게 나오는 것은 밀어치는 것, 공간 활용해 때리는 연습으로 극복하려 한다”고 밝혔다.
한국도로공사에는 준수한 레프트 자원이 많다. 문정원의 뒤에는 김선영, 황민경, 김미연, 고예림 등이 대기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동료들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장점을 배우려 애쓴다.
“민경 언니는 작지만 기교가 좋아요. 블로킹을 보고 잘 때리죠. 시야가 넓거든요. 선영 언니는 각이 좋아요. 저는 크로스나 스트레이트로 그런 각이 잘 안 나오거든요. 미연이는 손목 힘이 타고났어요. 따라하려 노력하지만 그렇게는 잘 안 돼요. 다 보고 배울 수 있죠.”
유달리 뚫기 힘든 선수가 없냐고 물었더니 “작은 나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전부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한국 최고의 세터 이효희와 룸메이트로서 한솥밥을 먹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덧붙인다. 배구가 잘 돼서 그런지 이젠 어떤 토스를 원하는지 의사 표현도 확실히 할 수 있게 됐다.
“랠리를 빨리 끝내자는 생각만 해요. 어깨에 힘 주지 않고 빨리 때리는 것이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 효희 언니는 특별한 존재시죠. 제가 정신 못 차릴 때는 따끔한 충고를 해주시다가도 힘내라고 토닥여주십니다. 어릴 때는 경기를 못 나가 그런지 세터 언니들한테 어떤 공을 좋아하는지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말하다보니 전에 올려주시던 분들께 미안하네요. (웃음)”
◆ V1, 국가대표, ‘배구선수’ 문정원 알리기
“장샘(장소연), (정)대영, (김)해란, (이)효희 언니들과 함께 코트에서 뛰는 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한 경기 한 경기가 전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가슴에 별이 없잖아요. 제가 처음으로 주전으로 자리잡기도 했으니 꼭 한 번 우승해보고 싶습니다.”
한국도로공사는 2005년 V리그 출범 이래 유일하게 우승컵을 들어보지 못한 팀이다.
프로 원년 2005 시즌 정규리그 1위로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하고도 KT&G에 패하며 눈물을 흘렸다. 2005~2006 시즌에서도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했지만 흥국생명의 벽에 막혔다. 이후로는 챔피언결정전 문턱도 밟지 못했다.
문정원은 “내가 뒤에 있어봐서 잘 안다. 선수들 모두가 파이팅해야 힘이 나고 승리할 수 있다”며 “우승이라는 건 코트의 선수는 물론이고 ‘닭장(웜업존)’의 선수들, 구단 직원, 팬까지 모두가 간절해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이 파이팅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우승컵 다음은 태극마크다. 황연주(현대건설) 이후 왼손잡이 공격수가 전무하기에 국가대표팀 승선이 결코 꿈만은 아니다. 주전 공격수는 힘겨울지 몰라도 원포인트 서버로서는 경쟁력이 충분하다. 그는 “부족한 건 알지만 한 번은 달고 싶다. 당연히 욕심이 난다”고 눈을 반짝였다.
궁극적인 목표는 ‘배구선수 문정원’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
한국 대표 포털사이트에 문정원이라는 석 자를 치면 안타깝게도 유명 MC 이휘재의 배우자 문정원 씨가 먼저 튀어나온다. 그는 “이름을 알리려면 아직도 많은 경험과 활약이 필요하다”며 “문정원하면 잘 했던 배구선수라는 이미지를 심고 싶다”는 포부에 힘을 주었다.
[취재 후기] 20대 초반의 나이지만 3년의 무명 생활을 딛고 일어나 그런지 매우 성숙했다. 그는 “힘든 순간이 지나가더라. 울기도 많이 울었다”며 “자리가 없어서 공격, 리시브 한 번이라도 더 하려고 노력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배구가 이렇게 재밌는데 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할 것”이라며 “딱 지금만큼만 잘 하고 싶다. 더 잘하면 좋겠지만 조금만 못해도 팀에 피해가 갈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문정원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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