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8년 만에 값진 승리를 거두며 대회를 마감했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세계최강 독일을 격파하며 많은 감동을 안겨줬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에만 도취돼 있을 수는 없다. 스포츠Q는 이번 대회 한국 축구가 남긴 의미와 보완점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스포츠Q(큐) 김의겸 기자] 월드컵을 앞두고 32개 대표팀 감독들은 고심을 거쳐 23명의 최종 엔트리를 구성해 제출한다. 이번 러시아 대회를 앞두고 신태용 감독의 선택을 받은 선수들 중 가장 대중의 예상을 빗겨갔던 문선민(26·인천 유나이티드)과 이승우(20·헬라스 베로나), 그리고 여론에 반하기까지 했던 김영권(28·광저우 에버그란데)의 본선 활약을 종합해본다.
추가로 넘버 2 골키퍼에서 대회 직전 넘버원 골리 김승규(29·비셀 고베)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한 조현우(27·대구FC)까지 총 네 선수가 ‘신(申)심’에 제대로 부합했는지 돌아보자.
◆ K리그 속 흙진주 발견, 문선민
신태용 감독이 선택한 선수들 중 유독 검증이 안됐다는 이유로 가타부타 말이 많았던 대표적인 이가 바로 문선민이었다. 신 감독은 지난 5월 14일 26인의 예비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문선민은 스웨덴 축구를 잘 아는 선수, 골에 굶주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선발 이유를 밝혔다.
문선민은 신태용호의 '플랜 A' 4-4-2 전형에서 주전으로 낙점 받을 것이 유력했던 권창훈(24·디종)과 이근호(33·울산 현대), 백업이 유력했던 염기훈(36·수원 삼성)이 월드컵을 한 달여 앞두고 부상으로 낙마하자 이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 감독의 선택을 받았다.
문선민은 당시 K리그1 인천 소속으로 6골을 터뜨리며 국내 선수 중 이동국(전북 현대)과 함께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였다. 빠른 발과 직선적이고 도전적인 움직임, 그리고 이번 시즌 수준 급의 골 결정력까지 보여주며 많이 뛰고 열심히 압박하는 공격수라는 점에서 신 감독의 철학에 들어맞았다.
예비 엔트리에 함께 들었던 이승우, 이청용(30·크리스탈 팰리스)과 경쟁을 펼쳤고 온두라스와 데뷔전에서 문전 앞 침착한 플레이로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그에게 생소했던 팬들의 뇌리에 존재를 각인시켰다. 결국 그는 최종 명단에 승선한다.
많은 이들은 스웨덴 3부리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1부리그까지 섭렵했던 ‘스웨덴 통’ 문선민이 조별리그 첫 경기에 선발 혹은 교체로 나설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예상을 뒤엎고 스웨덴전엔 결장했고 멕시코전과 독일전엔 연속해 선발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스웨덴에 지고 승리가 절실했던 2차전 멕시코와 경기에 이재성과 함께 측면 미드필더로 나선 문선민은 역습의 첨병 역할을 해냈다. 멕시코 수비가 빌드업을 시작할 때 그가 보인 전방 압박은 한국이 승리에 굶주렸으며 스웨덴전과는 컨셉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독일전도 마찬가지였다. 후반전은 없다는 듯 전반부터 상대 진영을 누비며 전방 압박을 펼쳤다. 후반 20분에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결정적인 찬스도 맞았다. 슛 타이밍에서 한 차례 접으면서 수비에 막히고 말았지만 독일 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록 공격포인트를 만들진 못했지만 A매치 경험조차 많지 않았던 그의 활약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K리그1에 복귀하자마자 최강 전북을 상대로 멀티골까지 터뜨렸다. 월드컵 경험은 그에게도 큰 자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문선민 발탁은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에 부족했던 직선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은 앞으로도 그가 대표팀에 발탁될 가능성을 높여주는 부분이다.
◆ 존재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던 이승우
이승우는 문선민과 더불어 ‘깜짝 발탁’된 대표적인 선수다. 이승우와 문선민 모두 A매치 출전 기록이 없었는데 월드컵이란 큰 대회를 앞두고 신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바르셀로나 유소년 시스템에서 스페인 축구를 오래 경험한 그는 연령별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저돌적인 돌파와 지능적인 플레이, 축구 센스는 그가 향후 한국 축구를 이끌 재목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무기였다.
그러나 이승우 선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성인 무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바르셀로나에서 프로 데뷔 기회를 잡지 못한 이승우는 2017~2018시즌을 앞두고 이탈리아 세리에A 승격팀 헬라스 베로나로 이적했다. 시즌 후반에는 기회가 늘며 AC밀란을 상대로 데뷔골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14번 출전했고 선발 기회는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이에 팬들 사이에서 이승우 발탁에 대한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국내서 개최된 20세 이하(U-20) 월드컵의 감독으로 나서 이승우 효과를 제대로 누렸던 신 감독은 내심 이승우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활약하며 최소한의 선발 명분을 안겨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를 예비 엔트리에 선발했다. “몸싸움이 약하다, 성인무대에 통할 체격이 아니다”는 팬들의 우려 속에 나선 A매치 데뷔 경기 온두라스전에서 손흥민의 골을 돕는 등 전에 없었던 플레이를 펼치며 기대감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나선 월드컵, 이승우는 많은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0-1로 끌려가던 스웨덴전 후반 28분 구자철(29·아우구스부르크)을 대신해 경기장에 나선 이승우는 경기 내내 몸이 무거워 보였던 대표팀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후반 37분 이승우는 페널티 박스 밖 오른쪽에서 안쪽으로 치고 들어오며 왼발 슛을 날렸다. 비록 수비에 막혀 코너킥으로 연결됐지만 한국에 꼭 필요했던 분위기를 바꿔주는 플레이였다.
멕시코전에도 후반 중반 교체 투입된 이승우는 대회 전반적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진 못했지만 팀과 팬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벤치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후반전에 한국이 변화가 필요할 때 유용할 카드가 있다는 희망을 줬다.
대표팀 막내로서 값진 경험을 한 이승우는 손흥민 등과 함께 차세대 에이스로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 김영권, 비난을 찬사로... 이 악다문 그의 투혼
김영권은 이번 대회 비난을 찬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불과 1년 전 이란과 월드컵 최종예선서 “관중 함성” 발언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그는 본선 3경기 내내 철옹성 같은 수비와 몸을 던지는 투지로 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제는 월드컵 활약으로 터키 수페르리그 명문 베식타스 등으로부터 러브콜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대표팀 수비진에는 굴곡이 많았다. 울리 슈틸리케 체제에서 붙박이로 선발을 보장받았던 김영권과 장현수(FC도쿄), 홍정호(전북 현대)가 모두 부진하자 신태용호에선 ‘슈퍼루키’ 김민재(전북 현대)가 급부상했다. 김민재가 대표팀 부동의 스타팅 멤버로 자리잡는 사이 김영권은 대표팀에서 멀어졌다. 그랬던 그에게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김민재가 리그 경기를 치르던 중 종아리 뼈 부상으로 월드컵에서 낙마하게 된 것.
대표팀으로 돌아온 김영권은 온두라스전 별다른 위협에 처하진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수비를 지켰다. 이후 최종 평가전이었던 세네갈전에도 장현수와 함께 선발로 나섰던 그는 주전 중앙 수비수로 낙점 받았다. 많은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스웨덴전, 그는 몸을 던지는 그림같은 태클로 한 골을 막아냈고 멕시코와 2차전에서도 좋은 수비를 이어갔다.
1차전 패스미스로 페널티킥의 빌미를 제공하고 2차전엔 핸드볼 파울로 PK를 내줬던 파트너 장현수와 크게 대비됐다. 김영권은 독일과 최종전에서도 상대의 파상공세를 몸으로 막아냈을 뿐 아니라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결승골까지 터뜨렸다. 그야말로 월드컵에서 그는 최고의 수비수였다. 독일 축구전문지 키커가 선정한 조별리그 3라운드 베스트 11에 들었을 뿐 아니라 축구통계전문 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이 선정한 F조 베스트 11에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2014 러시아 월드컵 부진 이후 ‘중국화’ 논란과 인터뷰 실언 등 ‘욕받이’로 인내했던 4년의 기다림 끝에 신 감독의 부름에 가장 멋지게 응한 이로 김영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 조현우, 넘버투 골리에서 월드컵 최고 스타로
이번 대표팀 최고의 스타는 역시 ‘대(구) (데)헤아’ 조현우다. 영국 BBC와 후스코어드닷컴이 선정한 조별리그 베스트 11에 나란히 든 것으로 그의 이번 대회 활약을 정리할 수 있다. 전체 32개 팀의 골키퍼 중 가장 좋은 활약을 한 선수라는 뜻. 더불어 조현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크리스탈 팰리스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등 유럽 진출설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대회 보여준 활약은 그가 충분히 세계에서 통하는 한국 골키퍼임을 대변했다. 올 8월 있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될 가능성 역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병역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의 유럽 진출도 헛된 꿈은 아니라는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를 스웨덴전에 선발로 내세운 것 역시 신 감독의 선택이다. 근 1~2년간 조현우는 K리그 톱 골키퍼로 군림했지만 대표팀엔 부동의 수문장 김승규가 버티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세르비아와 평가전 등 간간히 경기에 나설 때마다 좋은 활약을 보였던 조현우는 월드컵에서 기회를 쟁취했다.
공중볼 처리에 장점을 가지고 있는 조현우는 높이가 좋은 스웨덴과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눈부신 선방 몇 차례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조현우는 이날 공식 경기 최우수선수(MOM)로 선정됐다. 이후 멕시코전과 독일전에도 눈부신 ‘선방쇼’로 골문을 안정적으로 지킨 조현우는 독일전에 한 번 더 MOM을 차지했다.
신 감독의 소신 있는 선택에 활약으로 응답한 네 선수의 월드컵 경험은 앞으로 한국 축구에 큰 자산이 될 전망이다. 팬들의 의문부호를 느낌표로 바꿔낸 이들의 활약은 한국축구가 결과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4년 뒤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영표 KBS 축구 해설위원은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검증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축 선수들의 줄 부상으로 의외의 카드가 절실했던 신 감독은 '검증이 부족했던' 네 선수를 발탁했고 그들은 믿음에 활약으로 보답했다. 다음 월드컵까지 이들이 좋은 흐름을 이어가며 성장한다면 이번 대회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은 4년 뒤 카타르에선 보다 나은 결과를 내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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