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자 Tip!] 연식이 좀 된 야구팬이라면 김은식(42)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추억의 조각들을 맛깔나고 진솔한 문체로 조합해 독자들에게 내놓는 ‘야구 스토리텔러’다. 최동원, 이만수, 선동열, 장종훈, 양준혁, 박정태같은 대스타들은 물론이고 권두조, 양승관, 공필성, 방수원 등 평범하기 그지없는 선수들도 그의 손을 타고 날아올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정을 불사른 이들의 뒷모습에 주목한 그의 글에 많은 야구팬들이 감명을 받았다. 작가 김은식이 쓰면 무조건 구매한다는 열성팬들도 적지 않다. 그는 어떻게 ‘B급 선수’들을 어루만지는 감성을 갖게 됐을까.
[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최대성 기자] 복고 열풍이 나라를 뒤덮고 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격동의 시대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이 110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모았고 무한도전 '토토가' 열풍에 힘입어 1990년대를 강타했던 인기가요들이 거리 곳곳을 점령했다.
프로야구도 역사를 논하기 딱 좋은 시점에 왔다. 1982년 닻을 올린 프로야구가 34년째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국민학생’이던 이들은 어느덧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을 데리고 야구장을 찾는 나이가 됐다.
김은식의 책이 가교 역할로 제격이다. ‘동대문운동장’이란 책으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야구 메카를 다뤘다. 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국가대표’를 통해 기적의 우승 이야기를 들려줬다.
덕아웃을 지키는 사령탑 중에는 현역 시절 김용희(SK) 감독처럼 올스타전 MVP를 2회나 수상한 이가 있는 반면 염경엽(넥센) 감독처럼 통산 타율이 2할이 안 되는(0.195) 감독도 있다. 김 작가에게 이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염 감독같은 선수를 더욱 주목하고는 했다.
책을 통해 ‘마이너 감성’을 지닌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가 문자로 보낸 약속장소 지도도 확인할 수 없는 2G폰을 쓸 줄은 몰랐다. 그는 “통신비가 싸고 가볍고 배터리 부담도 없다”며 “안 바꾼 건 빈티지를 향한 일종의 미련”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 자꾸 지는 삼미가 만든 마이너 감성, "아픈 손가락이 좋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맨날 이겼다면요? 이런 마이너 감성의 작가는 되지 않았겠죠?”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삼미는 허구한 날 지는 팀이었다. 김 작가는 인천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저서 중에는 인천 야구와 관련된 책들이 많다. 버스를 타고 숭의야구장을 오가던 추억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가 다룬 선수들 대다수가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야구의 추억’ 첫 장은 박철순도 이만수도 김봉연도 아닌 MBC 청룡의 김인식이다.
“아픈 손가락들이죠. 생각하면 눈가가 촉촉해지는 선수들... 예를 들자면 이숭용? 최고는 아니었지만 찡한 선수들이 있잖아요. 늘 잘했던 이들보다는 방출, 재기, 부활한 선수들이 스토리도 더 많고 재미있죠.”
서서히 잊혀져가는 선수들, 무수히 많은 그렇고 그런 선수들이 김 작가의 예쁜 포장을 통해 재탄생했다. 그는 포털사이트에 게재한 칼럼에서도 조동화, 이우선, 이대수, 박정환 등 좀처럼 잠재력을 터뜨리지 못했던 ‘노망주’(늦은 나이에 가능성을 보이는 선수들)들을 다뤄 큰 호평을 받았다.
선수나 선수 가족으로부터 전화, 메일 등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김경기, 동봉철, 차명석, 성준 등이 김 작가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들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알아주는 김 작가의 글에 깊은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 야구, 단순한 공놀이가 아니더라
“야구가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은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매번 져서 속 터지는데 끊을 수 없는... 그게 바로 애증이겠죠? 특히 롯데나 KIA팬들에게서 그런 감정들을 많이 느꼈어요.”
그가 쓴 여러 저서 중 최고 걸작은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와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다.
2000년 4월 18일 잠실 LG전에서 2루로 뛰다 쓰러진 임수혁은 식물인간으로 10년을 살다 끝내 눈을 감았다. 찬란히 빛나지는 않았지만 알찼던 그의 커리어를 담은 후 ‘이제 그만, 일어나라. 임수혁’이라고 매듭짓는 김은식의 외침에 많은 야구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무참히 소외당했던 호남에 연고를 둔 해태와 그 지역을 상징하는 인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엮어낸 책 역시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수면 위로 꺼내기 금기시되던 지역감정을 야구와 정치와의 비교를 통해 애잔하게 풀어냈다.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에 심취해 ‘나도 야구 작가가 되겠다’고 꿈을 품는 젊은이들이 있다. 김은식은 말한다.
“만화도 아니고 팀을 이뤄서 할 수 없어요. 작가라는 직업은 시험 봐서 통과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글을 쓰고 그걸 누군가가 읽어주면 그게 곧 작가이지요.”
야구 단행본으로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무턱대고 그를 쫓아서는 안 된다. 생계는 논술 강사로 유지해왔다. 그는 “한국 야구팬들은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보는데 익숙하지, 책을 사서 읽지는 않으시더라”고 웃으며 “호기심을 갖고 역사를 곱씹기에는 아직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 '준야구인'의 꿈, 한국야구사 논하면 함께하고파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이광환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과 유승안 경찰청 감독을 만나고 왔다. 두산, KIA, 삼성, LG로 이어진 ‘~ 때문에 산다’ 시리즈의 다음편이 한화라 전 감독들을 취재하고 오던 참이었다. 창단 30주년을 맞은 독수리 군단의 이야기가 어떻게 담길지 자못 궁금해진다.
출범 34년째를 맞은 프로야구가 현재의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이야기꾼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야만 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을 기점으로 야구에 입문한 이들이 그와의 추억 여행에 동행하기에는 다소 어리다.
그는 ‘준야구인’이나 다름없다. 야구 작가로서의 스토리를 풍성히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은 없을까.
“그런 건 없어요. 저는 야구를 드라마보듯이 보는걸요. 그냥 즐기는 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일 뿐입니다. 깜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온 것 같아요. 요즘에는 좀 더 가치 있는 글, 아무도 다루지 못한 영역들을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는 대뜸 기자에게 ‘한국 야구를 가장 많이 바꾼 것이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물었다. 알루미늄 배트란다. 체급이 나뉘지 않은 야구에서 체구가 작은 한국인이 도구의 힘을 빌려 세계를 제패했기에 이만큼 야구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알루미늄 배트를 비롯해 조명탑, 메이저리그(MLB) 생중계, 아이스팩, 피칭머신 등을 다뤄볼까 구상중”이라며 “김은식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사는 독자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늘 망상을 한다. 조금이라도 매번 새로운 사람이고 싶다”고 귀띔했다.
꿈을 물었다.
“훗날 한국야구사를 집대성하는 시간이 올 때 김은식이란 사람이 필요하다고 거론된다면 뿌듯할 것 같은데요.”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이야기꾼’ 치고는 퍽이나 소박한 희망사항이다.
■ 김은식 작가는
1980~1990년대 선수들을 다룬 ‘야구의 추억’,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 프로 원년 우승팀부터 써내려간 ‘~ 때문에 시리즈’ 4권(두산, KIA, 롯데, 삼성), 인천 야구를 ‘조명한 126, 팬과 함께 달리다’, 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국가대표’, 프로야구 출범 30주년을 맞아 제작한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 등 야구 관련 서적을 17권 출판했다. 야구 역사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종종 등장한다. 야구책만 쓴 것은 아니다. 장기려, 우장춘, 이회영, 공병우 등의 전기와 에세이집도 낸다.
[취재 후기] 기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남는 건 데이터이고 야구팬들은 이를 통해 스타 선수를 추억한다. 다만 작가 김은식은 “배영수의 위대함과 그가 삼성팬들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어떻게 숫자로 표현하겠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다음 저서가 기다려진다. 충성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화팬들도 그의 글을 손꼽아 기다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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