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큐) 최준식 칼럼니스트] 저는 매주 수요일 오케스트라 연습실에서 열정과 꿈이 가득한 어린 친구들을 만납니다.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이들의 작은 출발이 큰 결실을 맺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 ‘어린 친구들’은 청소년 예술단체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의 일원들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클래식 음악을 접하지 못하던 저소득층과 다문화가정 청소년에게 예술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예술영재의 발굴과 예술을 통한 전인교육을 실현하고자 2010년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를 발족했습니다. 그 결실로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과 유명 클래식 무대에 왕성히 활동하고 있고 일부는 국내 최고의 음악대학에 진학해 클래식 아티스트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동안 모이지 못했던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 정기연습이 최근 국공립문화시설의 운영 재개로 다시 시작됐습니다. 간만에 보는 해맑고 영롱한 얼굴들로 연습실이 활기에 가득 찼습니다. 2시간의 연습 내내 어쩌면 그렇게 악기 연주에 집중하고 몰입하는지 대견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대부분 초등학생과 중학생인데도 프로 연주자처럼 음악의 깊이를 이해하고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이 정말 기특했습니다. 단원들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진지함을 바라보며 음악적 역량뿐만 아니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인성교육의 효과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단체에 왔을 때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단원 활동을 통해 진지한 예술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며 이 오케스트라의 예술교육 효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가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지만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는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와 비견되고 있습니다. 1975년 베네수엘라 경제학자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직접 예술감독이 돼 100여개가 넘는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네트워크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엘 시스테마의 시작입니다. 엘 시스테마의 조직 목적은 범죄가 만연한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데 있었습니다. 엘 시스테마는 범죄 예방뿐 아니라 전국에서 클래식 붐을 일으켰습니다. LA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구스타포 두다멜 같은 유명 음악 영재도 배출했습니다. 엘 시스테마는 하나의 ‘운동’으로 세계에 전파돼 중남미는 물론 미주 전역에도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부터 추진된 세종문화회관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이 '한국의 엘 시스테마'인 까닭입니다.
엘 시스테마의 추진 의도에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엘 시스테마가 시작된 1975년은 당시 원유 매장량 1위 국가인 베네수엘라가 재정적으로 풍족한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독재자 차베스의 정권 홍보에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단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빈민층이 아닌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이 다수였으며 교육도 단원들에게 연습을 강요하는 등 강압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로 인해 정부 지원이 줄어들자 단체 운영을 위해 오케스트라가 상업적으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엘 시스테마를 시작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는 2018년 타계했습니다. 현재도 엘 시스테마들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클래식을 통한 저소득층 청소년 예술교육 효과만큼은 분명합니다. 엘 시스테마는 하나의 ‘정신’이 됐습니다. 세계적으로 문화소외 청소년 예술교육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세종문화회관이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외에 각 교육청과 지역 문화재단, 민간단체에서 엘 시스테마형 오케스트라 지원과 창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도적 지원과 민간의 후원을 통해 엘 시스테마는 대한민국 클래식 중흥의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엘 시스테마가 청소년 예술교육의 표준으로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엘 시스테마의 본질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시대적 유행이 아닌 엘 시스테마의 정신이 이어지기 위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첫째, 엘 시스테마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가치가 잘 전파돼야 합니다.
예술은 구속이 아니라 해방을 통해 역량이 발현됩니다. 최근 창단되는 엘 시스테마형 오케스트라에 오는 단원들은 문화적으로 소외된 저소득층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에게 음악을 통한 자신감과 자립심을 심어줘야 합니다. 몇 회 공연, 매주 연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원 활동을 통한 음악적 성장과 심리적 평화가 중요한 목적이 돼야 합니다. 결과물이 아닌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단원들의 모습에 박수를 쳐주고 응원해줘야 합니다.
둘째, 단원들의 예술적 성장이 계속적인 음악 활동으로 이어지게 해야합니다.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는 단체 운영 10년을 통해 아이들의 음악활동을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꾸준히 지원하고 예술대학까지 진학시켰습니다. 즉, 전문연주자 개인의 한 사이클을 경험하게 한 겁니다. 어릴 적 가진 음악 열정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원이 이뤄져야 합니다. 재미가 실력이 되고 프로가 될 수 있도록 교육 방법도 고도화돼야 합니다. 사회경제적 이유로 재능 있는 청소년 단원이 예술활동을 중단하지 않도록 끈기 있는 제도적 지원과 민관의 관심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셋째, 이제 한국형 엘 시스테마의 모델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
엘 시스테마는 세계적인 트렌드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만이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엘 시스테마의 전형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이 주도하고 민간이 후원하는 ‘한국 엘 시스테마 오케스트라 축제’를 매년 개최해 다양한 청소년오케스트라간 교류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또한 세계의 엘 시스테마와 연계해 해외교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지원사업이 이뤄졌으면 합니다. 또한 지휘자 두다멜처럼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세계적인 예술영재를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도록 예술교육 교수법 발전도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제가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에서 가장 감동을 느꼈던 부분은 예전 단체의 일원이었던 청소년들이 단체의 지원으로 진학하고 예술인으로 성장하여 현재 단원들을 가르치는 강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롤모델이 직접 자신을 가르치고 이들이 다시 후배들을 성장시키는 ‘성장의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지켜보며 엘 시스테마의 뿌리는 ‘성장과 연대’라는 것을 느낍니다. 예술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서로를 이끌어주며 훌륭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엘 시스테마의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집단이 파편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 엘 시스테마가 예술을 넘어 청소년 성장의 새로운 방식으로 각광받길 기대합니다.
최준식
- 스포츠Q(큐) 문화 칼럼니스트
- 예술평론가, 서울시 세종문화회관 근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축제 심의위원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 평가위원
- 한국디자인진흥원 우수디자인 심사위원
- 조달청 축제 기술평가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