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김한석 기자] 4일 중국 우한에서 벌어진 동아시안컵 여자축구 한일전에서는 감동의 골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유니폼 세리머니였다. 금발의 조소현이 활짝 펼쳐든 붉은 유니폼에 선연히 4번이 아로새겨져 있다. 주인 떠난 붉은색 저지는 중국 우한의 밤하늘에 빛났다. 동아시안컵 여자축구 결전 첫날 중국전에서 투혼을 불사르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돼 4일 중도 귀국한 동료 심서연을 위한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의 골 세리머니였다.
이날 숙명의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30m 중앙 돌파 끝에 동점골을 넣은 주장 조소현은 동료들과 벤치로 달려가 심서연의 유니폼을 펼쳐보이며 쾌유를 함께 빌었다. 여자축구대표팀의 ‘심서연 유니폼 세리머니’가 보여준 훈훈한 동료애는 감동을 낳았고 적어도 이번 대회가 끝날 때까지는 태극낭자들을 결속하는 힘이 될 것으로 확신하게 됐다.
골 세리머니. 정확한 용어는 골 셀리브레이션(goal celebration)이다. 우리말로 풀자면 골 뒤풀이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선전을 기원하며 ‘고고(Go Go)’ 보다는 우리식 외래어 ‘파이팅’이나 ‘아자 아자’를 외치듯, 골 세리머니든, 골 셀리브레이션이든 어떠리. 골을 넣은 뒤 환호작약하는 감동의 제스처를 ‘의식’으로 보거나, 개성과 끼를 표현하는 색다른 ‘개인기’로 보거나, 골이 전하는 감동을 나눠 느끼면 족한 것을.
헌데 그게 ‘약속된 의식’이 되면 그 메시지에 주목해볼 일이다. 사전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준비하거나 선수들끼리 ‘즐거운 모의’를 통해 만들어낸 작품이라면 그 스토리에 담긴 의미는 감동을 배가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고동락하다가 불의의 부상이나 죽음으로 막상 중요한 결전이나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동료들을 잊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면 더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 나온 ‘심서연 세리머니’를 보면서 이날 FC바르셀로나의 주장으로 선임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이 예전에 펼쳤던 골 셀리브레이션부터 생각난 것은 동료애에 대한 닮은꼴 헌사였기에 때문이리라.
네덜란드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 연장전에서 스페인의 우승을 이끄는 결승골을 넣은 스페인의 이니에스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의를 벗어던지고 언더웨어를 당당하게 내미는 뒤풀이를 펼쳤다. 가슴팍에는 ‘다니엘 하르케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라는 스페인어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유니폼을 벗어 규정 위반으로 옐로카드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대의를 품고 감행한 그의 용감한 행동에 지구촌 축구팬들은 뜨거운 감동을 공유했다. 스페인 수비의 미래로 주목받다가 2009년 프리시즌 투어 중 심장마비로 저 세상으로 간 친구 하르케가 시나브로 잊혀져가는 분위기를 깨우기 위해 추모 메시지를 행동을 보여준 이니에스타의 용기는 딥 임팩트를 남겼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프고도 코믹한 세리머니가 화제를 낳았다. 에콰도르의 이반 카비에데스가 코스타리카와 조별리그에서 16강행을 결정짓는 쐐기골을 넣은 뒤 펼친 스파이더맨 세리머니. 골을 넣고 달려가다 갑자기 바지춤에서 노란색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뒤집어 쓰고 기쁨을 표현했다. 월드컵 1년 전 가족을 만나러 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대표팀 후배 테노리오의 세리머니를 대신한 것이다. 테노리오는 생전에 아들을 위해 골을 넣으면 마스크를 뒤집어 쓰는 뒤풀이를 펼쳐 ‘스파이더맨’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카비에데스가 그의 아들을 위해 월드컵 무대에서 웃픈 뒤풀이로 재연한 뒷이야기가 알려져 축구팬들의 가슴을 애잔하게 했다.
고인이 된 동료 외에도 불의의 부상으로 고대하던 결전 무대를 밟지 못한 동료들을 위로하는 세리머니도 월드컵 무대에서 부각됐다.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대표팀이 시상식 뒤 꽃술이 깔린 피치에서 트로피를 앞세우고 기념 촬영을 하려는 순간 등번호 21번의 유니폼이 등장했다.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5골을 넣으며 본선행을 이끌었지만 출정 직전 발목인대 파열로 브라질에 오지 못한 마르코 로이스의 저지였다. 월드컵 우승 펼침막에 그의 유니폼을 걸고 영원히 기억될 우승 비망목 사진의 한 자리를 남긴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천수가 2006년 월드컵 토고전에서 골을 넣은 뒤 펼친 키스 세리머니가 대표적이다. 이동국을 위한 헌사였다. 부상으로 두 번째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이동국이 골을 넣으면 자주 하던 스타일을 따라한 우정의 세리머니였던 것이다.
동료의 쾌유를 비는 골 셀리브레이션은 국내에서도 대표적인 사례가 있었다. 2011년 5월 서귀포에서 열린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멜버른전에서 골을 넣은 제주 김은중이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더니 상의를 들어올렸다. 언더셔츠에 씌여진 ‘일어나라 영록아’란 문구는 바로 사흘 전 K리그 경기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던 동료 신영록의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였다. 단짝 박현범은 신영록의 유니폼을 안에 하나 더 입고 친구가 깨어나길 간절히 빌며 그라운드를 뛰었다. 그런 동료애에 하늘도 감동했기에 신영록은 나중에 회복할 수 있었다.
단체종목 스포츠는 케미스트리가 중요하다. 극한상황을 이겨내는 훈련도 그렇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동료들을 더욱 믿고 의지하며 결속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에 끈끈한 동료의식과 팀 플레이는 주전 경쟁이나 개인 플레이보다 늘 우위의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축구의 골 세리머니에서 이런 동료애가 행동으로 표출됐을 때 큰 반향과 감동을 부르는 것은 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발로 하는 운동, 즉 생각하는대로 조직력이 잘 갖춰지지 않는 종목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골 세리머니도 이번 동아시안컵 여자대표팀처럼 미리 선수들이 ‘누구를 위해 하자’‘어떻게 하자’ 등의 약속을 함으로써 작은 목표가 생겨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 집중하는 효과도 나온다.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은 두 달 전 캐나다 여자월드컵에 출정하기 직전 여민지가 불의의 부상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이에 박은선 조소현 지소연 등 대표팀 언니들은 동생 여민지를 위한 골 세리머니를 준비했지만 첫 16강 진출을 이뤄내는 과정이 너무도 숨가쁜 혈전의 연속이었기에 미처 그 세리머니를 피치에서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월드컵의 피로가 채 가시기 전에 부상자도 많이 생겨나는 가운데 출전한 동아시안컵에서 막상 중도 귀국자까지 발생하자 동료를 위한 골 세리머니를 다시 준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여자축구 선수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외롭다”고 외쳐온 태극낭자들이 심서연을 위한 세리머니로 심리적인 결속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세리머니에서는 골 넣는 주인공이 심서연 유니폼을 치켜들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중국전에서 자신의 중원 포지션을 맡다가 다친 심서연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을 법한 조소현이 직접 골을 넣어 그 세리머니를 주도했다는 점은 ‘여자 기성용’으로 불리는 중원사령관 조소현이 팀의 우승을 위해 더욱 힘을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동아시안컵 한일전 승리로 2연승을 거둔 한국 여자대표팀. 역시 2연승을 달린 북한을 상대로 오는 8일 10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한국 여자대표팀이 줄부상 속에 ‘원팀’으로 다시 힘을 모으게 된 ‘심서연 세리머니’ 효과가 이어져 화룡점정할 수 있을 것인지 더욱 시선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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