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자 Tip!] 우리나라 스포츠에서 여성 지도자가 성공하기란 너무나 어렵다. 특히 구기종목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여성 지도자들이 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빛을 보지 못했다기보다 빛을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여자 프로농구나 V리그 여자부에서 여성 감독이 팀을 지휘하는 사례가 너무나 제한적이었고 그만큼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생순'의 주인공 임오경(43) 서울시청 감독이 핸드볼에서 여성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그것도 2008년 창단 이후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을 차지해보지 못했던 '언더독' 서울시청이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올림픽공원=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노민규 기자] 서울시청과 삼척시청(원더풀 삼척)의 여자부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가 벌어진 6일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은 적지 않은 팬들이 몰렸다. 서울시청을 응원하는 빨간 응원용 풍선막대와 삼척시청에게 환호를 보내는 주황색 풍선막대를 든 관중들이 응원 대결을 펼쳤다.
이날 경기는 서울시청과 삼척시청 가운데 어느 한 팀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결승전'이었다. 서울시청이 이기거나 무승부, 2골차 이내로 져도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삼척시청은 지난해 우승을 차지했던 강호. 서울시청이 첫 경기에서 22-19로 이겨본 상대이기는 하지만 만약 3골차 이상으로 진다면 골득실 또는 승자승 원칙에 따라 정규리그 2위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들의 훈련을 안경 너머 매서운 눈초리로 지켜보던 임오경 감독은 약간 입이 타들어갔다. 선수들을 믿는다지만 자칫 삼척시청에 덜미를 잡히기라도 한다면 다 잡았던 정규리그 1위를 눈 앞에서 놓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 "너희들은 우승에 목말라 있어, 이번에 한번 경험해봐"
서울시청은 3일 인천시청전에서 아쉽게 22-22로 비겼다. 이 경기에서 이겼더라면 삼척시청전 결과에 관계없이 일찌감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챔피언전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임오경 감독은 인천시청전이 끝난 뒤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조했다.
"선수들에게 늘 정신력을 강조하죠. 그리고 한번 죽도록 뛰어보라고 말합니다. 정상은 서 본 사람만 압니다. 나부터도 그랬어요. 정상에 서게 되면 그 짜릿한 감각에 목말라서 지옥훈련이 힘든 줄도 몰랐어요. 그래서 미팅에서 선수들에게 '너희는 정상에 목말라 있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정말 선수들은 우승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다. 서울시청은 그동안 리그에서 단 한번도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임오경 감독이 2009년부터 지휘봉을 잡았지만 지난해 4위를 거둔 것이 그나마 최고 좋은 성적이었다.
임 감독의 '정신력 강조'는 삼척시청과 마지막 경기 직전까지도 이어졌다. 우승에 목말라 있으니 이번 경기에서 한번 경험해보라고 다독이고 힘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2골차로 져도 된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리라고 주문했다.
"너희들이 진정한 정규리그 1위가 되고 싶다면, 진정한 우승팀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골득실이나 승자승이 아니라 확실하게 이겨보이라고 했습니다. 2골 차로 져도 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 한때 2골차 뒤졌지만 골리 주희 선방 속에 역전쇼
전반은 박빙이었다. 삼척시청 골리 박미라에 막혀 오히려 2골차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선해와 윤형경의 연속골로 전반 막판 11-11 동점을 만들었고 최임정까지 오른쪽 사이드에서 역전골을 넣으며 12-11로 다시 역전시켰다. 전반은 12-12 동점.
후반 초반에도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골리 주희가 선방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서울시청이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주희의 슈퍼 세이브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윤현경, 김선해의 연속골로 15-15 동점을 만든 서울시청은 이후에도 최수민, 김이슬, 이세미의 연속골이 삼척시청의 골망을 흔들면서 단숨에 18-15로 앞서나갔다. 2골 차로 져도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5골차 여유가 생긴 셈이다.
삼척시청으로서는 우승을 위해 공격 일변도로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서울시청은 바로 이 점을 잘 노렸다. 삼척시청이 골을 넣지 못할 때마다 역습 기회가 났고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갔다. 후반 18분 50초 21-19에서 시작해 7분 동안 내리 6골을 넣으며 27-19까지 점수가 벌어졌다.
임오경 감독은 권한나의 27점째 골이 들어가자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환호했고 이미 서울시청 응원석에서는 "이겼다"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들은 골이 들어갈 때마다, 그리고 골리의 선방이 이어질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경기가 30-22 승리로 마무리되자 임오경 감독은 선수들 하나하나 손을 흔들어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또 관중석으로 직접 걸어가 인사를 전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을 경험한 서울시청 선수들은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정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임 감독이 얘기한 것처럼 처음 맛본 우승은 너무나 황홀했다.
임오경 감독은 "전반 흐름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실수가 조금씩 나와서 자신감을 갖고 하라고 조언했다"며 "처음부터 골득실을 따지는 결과는 원하지 않았다. 삼척시청이 우승 경험이 풍부하다는 부분을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풀렸다"고 소감을 밝혔다.
◆ "아직 끝난게 아냐, 챔피언전이 남았어"
이날 경기 최우수선수(MVP)는 37개 슛 가운데 18개를 막아낸 주희에게 돌아갔다.
"상대 (박)미라 언니가 선방을 하니까 저도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저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막았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경기 MVP에 선정된 주희가 활짝 웃어보였다. 주희도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사실 저도 우승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서울시청으로 와서도 과연 여기서 우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임오경 감독님이 아무래도 여성이시니까 섬세한 면이 많았어요. 물론 그 섬세함 때문에 혹독한 훈련을 해야했죠. 훈련을 한번 하게 되면 될 때까지, 완벽하게 이뤄질 때까지 해야 되니까요. 할 때는 너무나 힘들었는데 완벽하게 될 때까지 하니까 오히려 더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환하게 웃으면서도 임오경 감독에 대한 '뒷담화'도 잊지 않았다.
"훈련할 때 실수를 하게 되면 버럭 화를 내시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모두가 완벽하게 될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모두가 하나가 돼 참고 견뎠어요. 리그 시작 전에는 하루에 전문 훈련을 5시간 정도 했어요. 아차. 이렇게 많이 했다고 하면 안되는데. 3시간으로 써주세요.(웃음)"
정규리그 MVP는 권한나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MVP가 누가 될 것 같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선수와 관중들 모두 '권한나'를 외쳤다. 모두가 권한나의 공로를 인정했던 것이다.
권한나는 삼척시청과 경기에서 8골을 넣으며 양팀 통틀어 최다골을 넣긴 했지만 아쉽게 득점왕을 놓쳤다. 이번 정규리그에서 122골을 기록, 정소영(SK슈가글라이더즈)에 3골 뒤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MVP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고 토로했다.
"팀에 보탬이 되겠다고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MVP를 받아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은 별로 없어요. 아직 부족한 걸요. 오늘 득점부문 1위를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삼척시청 수비가 워낙 견고해서. 넣을만큼 넣었다고 생각해요. 감독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말보다는 행동'이에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뤄내겠다고 하기보다는 경기에서 보여주는 거죠."
이어 권한나는 인천시청과 지난 경기가 가장 아쉬우면서도 서울시청이 우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은 경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한 골만 더 넣으면 우승인데라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아쉬웠어요. 하지만 그 경기에서 우승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우리가 정규리그에서 한 경기를 지긴 했지만 진 것은 진 것대로 앞으로 더 좋은 경기를 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돼요. 이제 챔피언전을 준비해야죠."
경기와 시상식까지 모두 마치고 경기장 밖으로 나간 임오경 감독은 선수들과 빙 둘러 서서 마지막 얘기를 남기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챔피언전이 남았잖아. 다시 하는거야."
◆ 서울시청의 전폭 지원도 우승 원동력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명승부를 펼쳤던 여자핸드볼 선수들의 감동 실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주인공인 임오경 감독은 한국 핸드볼의 전성기 시절을 보낸 대표적인 스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금메달)부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메달)까지 핸드볼 여자 대표팀의 핵심 멤버였다. 대학 졸업 후 일본에 진출해 새롭게 창단한 히로시마 메이플레즈팀의 간판선수이자 플레잉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2008년 서울시청 창단 사령탑으로 화려하게 한국 무대로 복귀했다.
임 감독은 여성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실업팀 감독을 맡아 6년째 팀을 이끌고 있다. 남성 감독들로 가득한 여자 핸드볼 팀에서 감독직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집념과 완벽주의로 정상에 우뚝 섰다.
선수시절부터 국가대표와 일본 플레잉 코치, 감독까지 역임하면서 생긴 내공을 바탕으로 지도자로서 첫 우승을 만끽했다.
선수들과 파이팅을 외친 임오경 감독을 다시 만났다. 추가 인터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 팀에 교체할 선수가 많다는 것도 우승하는데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체력을 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수비를 잘하고 속공으로 잘 풀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또 올해부터 승리수당이 생겼는데 그것도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아요. 1승에 20만원, 17명에게 돌아가니까 340만원이 나오죠. 삼척시청이 10만원이라고 하니까 실업팀으로서는 최고 수준이죠. 그리고 우리 팀 연봉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선수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서울시청은 정규리그 14경기에서 12승 1무 1패, 승점 25를 기록하며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10승 2무 2패로 승점 22의 인천시청이 2위를 차지했고 10승 1무 3패로 승점 21을 기록한 삼척시청이 3위에 올랐다. 대구시청(컬러풀대구)은 9승 1무 4패, 승점 19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다.
이들 네 팀의 실력은 임오경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비등비등'하다는 것이다. 대구시청은 서울시청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긴 팀이고 인천시청도 서울시청과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며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여줬다. 삼척시청 역시 지난해 우승팀이어서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임오경 감독은 정규리그 우승에서 그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남은 것은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다.
"원래 챔피언전 진출까지만 목표로 했는데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아야죠. 실책만 줄인다면 챔피언전에서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겁니다. 또 다시 준비해야죠."
정상을 향한 서울시청의 뜀박질이 또 다시 시작됐다.
[취재후기] 서울시청은 15일부터 3전2선승제로 진행되는 챔피언결정전에 선착했다. 3위 삼척시청과 4위 대구시청의 승자가 인천시청과 맞붙고 여기서 이기는 팀이 서울시청과 만나게 된다. 임오경 감독은 어느 팀이든 어려운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도 임 감독은 선수들을 믿는다고 했다. 챔피언에 오른다면 기본 한 달 휴가도 화끈하게 준다고 했다. 임오경 감독의 '큰 언니 리더십'이 빛을 발할지 지켜보는 것도 참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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