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유독 길게 느껴졌던 2020년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속 무관중 경기, 시즌 조기종료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독 유니폼을 벗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성대한 은퇴식이 마땅한 선수들임에도 조촐한 기념식 정도만을 진행한 뒤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2020년을 돌아보며 이들의 발자취에 대해 돌아보고자 한다.
◆ ‘라이온킹’ 이동국, 불운 이겨낸 근면성실 아이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하고 감독 경질까지 이어졌지만 희망적인 소식도 있었다. 이동국(41)의 발견이었다. 이후 이동국은 빠르게 성장해 한국 축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월드컵 앞에서는 불운이 이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플레이 스타일을 이유로 선발되지 않았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이어갔음에도 불의의 부상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16강 우루과이전에 교체로 나섰으나 결정적인 슛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해 일부 축구팬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시련이 그를 한 발 더 뛰게 만들었을까. 이동국은 K리그에선 날아다녔다. 미들스브러(잉글랜드)에서 실패 후 K리그에 돌아온 뒤 부침이 있었으나 전북 현대와 최강희 감독을 만나며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전북의 K리그 역대 최초 4연패, 최다 우승(8회)을 이끌었다. 모든 게 이동국 입단과 함께 시작됐다.
불혹이 넘어서까지 건재함을 과시하며 통산 548경기 228골 77어시스트, 최다득점, 최다공격포인트, 최초 70-70 클럽에 가입했다. 올 시즌에도 11경기 4골을 넣으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나아가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의료진을 위해 ‘덕분에 챌린지’ 세리머니를 해 화제를 모았다. 지난 6월엔 FC서울전 골을 넣고 미국 경찰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위해 인종차별 반대 세리머니도 펼쳤다. K리그1 시상식에서 공로상과 함께 베스트 포토상까지 수상했다.
방역 지침으로 인해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순 없었지만 성대한 은퇴식을 치렀다. 모범적인 선수 생활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준 이동국. 마지막까지 화려했던 이동국은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피치를 떠났다.
◆ 박용택 김태균, 프로야구 한 획을 긋다
프로야구에선 유독 더 많은 레전드들이 작별을 고했다. 가장 대표적인 건 박용택(41)이다. 2002년 데뷔해 19시즌 동안 LG 트윈스 원클럽맨으로 활약하며 역대 최다인 2500안타를 달성해낸 그다. 통산 가장 많은 2236경기에 나서 타율 0.308 2504안타 213홈런 1192타점 1259득점 등을 기록한 프로야구 손에 곱히는 전설이다.
시즌 전부터 은퇴를 예고했는데, 은퇴 투어 얘기가 나오자 반발 여론이 적지 않았다. 2009년 타격왕 등극 과정에서 박힌 미운털 때문이었다. 당시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팀이 경쟁 상대였던 홍성흔과 승부를 피하는 걸 지켜보며 웃었던 걸 두고 ‘졸렬택’이란 별명이 남았던 탓이다. 이후에도 수차례 사과를 했지만 박용택에겐 잊지 못할 불명예로 남았다.
그렇다고 박용택의 가치가 저평가 받을 이유는 없었다. 누구보다 꾸준히 활약했고 마지막 시즌까지도 타율 3할을 기록하며 은퇴를 아쉽게 만든 선수였다. 큰 사건·사고 없이 커리어를 마쳤다는 것도 귀감이 된다. 반대 여론 탓에 은퇴 투어를 진행하진 못했으나 각 팀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박용택을 위한 고별식을 진행해줬다.
김태균(38)도 한화 이글스 원클럽맨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다. 2001년 데뷔한 김태균은 한국을 대표하는 우타 거포이자 한화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신인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단숨에 한화 중심타자로 거듭났다.
3할 20홈런이 보장되는 타자로 거듭난 김태균은 리그를 정복한 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선 홈런(3개)과 타점(11개)왕에 등극하며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일본프로야구(NPB)에서도 첫 시즌 올스타에 선발될 정도로 화려한 시절을 이어갔다.
손목 부상과 부진 등이 겹치며 한화로 돌아왔으나 실력은 여전했다.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장타율이 줄긴 했어도 지난해까지 3할 타율을 기록했던 한화 4번 타자였다. 올 시즌 부진이 길어지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순 없었지만 통산 2009경기 타율 0.320(역대 9위) 2209안타(3위) 311홈런(공동 11위) 3357루타(4위), 출루율 0.421(2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영구결번이 유력한 한화 레전드다.
각종 시상식에서도 이들은 이름을 올렸다. 박용택은 2020 나누리병원 일구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에선 박용택은 기록상, 김태균은 공로상을 수상했다.
◆ 양동근, 아직은 아쉬웠던 이별
93% 출전, 10득점 4.6어시스트 1.2스틸. 불혹의 농구선수가 써낸 시즌 기록이다. 양동근의 은퇴가 아쉬웠던 이유다.
2004년 프로 데뷔한 양동근은 신인상과 수비 5걸상을 받으며 화려한 커리어의 시작을 알렸다. 14시즌 동안 뛰며 665경기(6위), 7875득점(8위), 1912리바운드(13위), 3344어시스트(3위), 981스틸(2위)에 올랐고 정규리그와 챔프전 MVP를 각각 4회, 3회 수상했다. 챔피언 반지는 무려 6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시즌을 마치고 지난 4월 은퇴 기자회견에선 후배 함지훈과 이종현, 조성민 등은 물론이고 유재학 감독까지 자리를 찾아 그의 자리를 빛냈다. 양동근은 뜨겁게 눈시울을 붉히며 시원섭섭한 감정을 전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시즌이 조기 종료되며 팬들과는 제대로 인사할 기회가 없었다. 울산 현대모비스는 지난 10월 홈 개막전 때 양동근의 공식 은퇴식을 마련했으나 역시 무관중 경기여서 아쉬움은 컸다. 백넘버 6번은 영구결번됐고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으며 마지막 정든 코트와 작별했다.
◆ 정조국 정근우 손승락 등, 조용히 떠나간 스타들
올 시즌엔 유독 팬들과 이별을 고한 선수들이 많았다. 축구에선 정조국(36)이 18년간 이어온 프로생활을 마무리했다. 청소년대표 에이스로 활약하던 정조국은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2003년 프로 첫 시즌 12골을 넣으며 신인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기대치에 비해 굵직한 타이틀이 부족했던 정조국은 2016년 친정팀 FC서울을 떠나 광주FC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늦은 나이 득점왕과 MVP에 오르며 뒤늦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월드컵엔 나서지 못한 점은 개인적으로도 큰 아쉬움이었으나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온다는 교훈을 안겨준 정조국이다.
‘악마의 2루수’ 정근우(38)도 은퇴를 선언했다. 국가대표 2루수로 맹활약했던 정근우는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끌었고 한화 이글스로 이적해서도 맹활약했다. 통산 1747경기 타율 0.302 121홈런 722타점 1072득점 371도루 등 화려한 커리어를 썼지만 커리어 막판 한화에서 부진했고 LG 트윈스에서도 부상이 겹쳐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한 채 마무리를 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박용택의 은퇴 투어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용한 마무리를 택한 배려 넘치는 정근우다.
구원왕 4회에 빛나는 손승락(38)도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택했다. FA 자격을 얻었으나 뜻대로 잘 이뤄지지 않았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겠다며 과감히 물러서기로 했다. 더 뛸 수 있는 여력이 있었기에 더욱 아쉬운 은퇴였다.
삼성 라이온즈 통합 4연패의 중심에 섰던 핵심 불펜이었던 권혁(37)과 권오준(40)도 커리어를 마감했다. 둘 모두 삼성에서 마당쇠를 자처하며 홀드왕을 차지했던 투수들이다. 권오준은 원클럽맨으로, 권혁은 삼성에 이어 한화, 두산을 거쳐 유니폼을 벗게 됐다.
한화 이글스 공식 마당쇠 송창식(35)도 17년 선수생활을 마쳤다. 버거씨병을 이겨내고 한화의 핵심 불펜으로 이겨낸 스토리로도 주목을 받았던 송창식은 ‘투혼의 대명사’로 기억될 만큼 한화를 위해 헌신했던 선수다.
윤희상(35)도 SK 와이번스에서만 활약한 이후 은퇴를 택했다. 2012년 10승을 기록하는 등 SK 선발진의 중심에 서왔던 그다. 올 시즌은 부상 속 단 4경기 출전에 그쳤고 지난 10월 은퇴경기를 가진 뒤 팬들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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