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자 Tip!] ‘시련은 있어도 실패란 없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들 역시 여러 이유로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를 이겨냈기에 지금까지 팬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다. 장거리 트랙에서 마라톤으로 전향한 염고은(21·삼성전자)도 운동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큰 시련과 마주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선수생활, 제2의 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첫 풀코스에서 국내 선수 1위에 오른 염고은은 지난달 두 번째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여자마라톤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두 번째 풀코스 만에 2시간 30분대에 진입한 염고은의 다음 기록이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화성=스포츠Q 글 이세영·사진 이상민 기자]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였을까. 장거리 선수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열일곱 천재소녀는 갑자기 육상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렸어요. 아무리 운동이 힘들어도 지금껏 세운 기록이 있으니 앞으로 계속 도전하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땐 제가 운동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어요.”
염고은은 2010년 김포제일고 시절 처음으로 뛴 5000m 경기에서 15분38초60으로 한국 기록을 경신하며 ‘제2의 임춘애’로 떠올랐다. 임춘애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에 오른 스타. '육상천재소녀'란 찬사가 쏟아졌고 그만큼 주위의 기대가 컸지만 염고은은 돌연 선수생활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체중도 급격하게 불었다. 절망의 끝으로 달려가던 염고은에게 손을 내민 이는 김용복(42) 삼성전자 육상단 코치. 그의 권유로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염고은은 잠재력을 마음껏 폭발하며 두 대회 연속 국내부 우승을 차지했다.
염고은은 “나에게 마라톤은 도전이다. 내 기록과 한국 신기록을 깨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정진할 것”이라고 마라톤화 끈을 불끈 동여맸다.
◆ '제2의 임춘애' 찬사, 부담으로 다가왔다
김포 양곡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과 인연을 맺은 염고은은 김포 금파중학교 때부터 한국 장거리 종목을 대표할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에는 몸무게가 30㎏대(현재 161cm 49kg)에 불과해 왜소했지만 뛰어난 심폐지구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마침내 2010년 전국종별대회에서 5000m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염고은은 이내 육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를 지도한 오영은(35) 코치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된 것이 방황의 발단이었다. ‘제2의 임춘애’라는 찬사를 얻은 것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선수로서 감사한 말이지만 그때는 그게 싫었습니다. 뒤늦게 사춘기가 왔던 것 같아요. 그분께도 죄송했고요. 더 잘 해야겠다는 마음보단 부담감이 밀려왔습니다. 마냥 숨고 싶었지요.”
그렇게 1년간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 염고은은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건 당연지사. 키가 자란만큼 체중도 10㎏ 이상 급격하게 불어났다.
◆ 선수인생을 바꾼 한 통의 전화
이때 염고은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이가 바로 김용복 삼성전자 코치였다. 당시 김포제일고 지도자를 통해 염고은과 통화를 한 김 코치는 그 길로 염고은을 영입했다. 마라톤 선수로서 제 기량을 펼칠 수 있게끔 2년의 시간도 줬다.
“김 코치님은 어렸을 때부터 절 지켜보셨는데,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셨어요. 운동을 그만 두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도 ‘너는 장거리 선수로서 충분히 대성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지요. 김 코치님의 그 격려 덕분에 망설이지 않고 마라톤으로 전향할 수 있었습니다.”
황규훈(62) 삼성전자 감독은 “오랫동안 방황을 해서인지 영입 당시에는 성격이 많이 내성적이었다”며 “팀 언니 오빠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성격을 바꾸기 위해 애썼다”고 회고했다. 이어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하며 체중조절을 했고 지방 대신 근육량을 늘렸다”며 염고은을 마라톤 선수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5000m를 뛰다 그 몇 십 배의 거리를 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훈련량부터 많았기 때문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염고은은 “그냥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페이스까지 조절해야 해서 버거웠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염고은이 팀에 들어온 뒤 적응에 애를 먹고 있을 때 선배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특히 현재 국내 여자마라톤 랭킹 1위 김성은(26)이 같은 여성 마라토너로서 많은 조언을 건넸다. 경기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어떻게 몸을 관리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줬다.
“마라톤 준비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저에게 마라톤은 어떻게 뛰어야 하고 경기 후에는 어떻게 몸 관리를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자기관리 능력이 뛰어난 성은 언니를 보면서 저도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선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국신기록, 3~4년 후 도전"
코칭스태프와 선배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마라톤 경기를 뛰기 위한 몸을 만든 염고은은 지난해 역전 마라톤으로 감을 잡은 뒤 10월 춘천 마라톤대회에서 국내 선수 가운데 1위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기록은 2시간 43분 34초로 정상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첫 풀코스에서 우승한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지난달 5일 치른 대구 마라톤대회에서는 무려 9분이나 자기 기록을 단축하며 2시간 34분 41초를 찍었다. 역시 국내부 1위를 차지한 염고은은 올 시즌 국내 선수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을 세우며 한국 여자 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로 이름을 높였다.
1997년 권은주가 세운 한국 신기록(2시간 26분 12초)이 18년째 요지부동이지만 염고은은 “부상만 없다면 3~4년 후에는 도전해 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황규훈 감독도 “주법만 봤을 때는 마라톤 선수로서 가장 적합하다. 팔과 다리 동작이 마라톤 선수에 최적화돼 있다”며 “고등학교 때 트랙 경기를 뛰어서인지 스피드도 좋다”고 평가했다. 이어 “방황의 시간을 보낼 때 기초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앞으로 체력만 보강한다면 김성은 못지않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장거리 트랙선수로서 승승장구한 뒤 방황했지만 마라톤화를 신고 새 도전에 나선다. 제2의 선수 인생을 연 염고은의 42.195㎞ 레이스가 이제 막 시작됐다.
[취재후기] 염고은은 겸손했다. 오는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와 내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이 유력하고 좋은 성적이 기대되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국제 대회와 국내 대회의 환경이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때문에 염고은은 앞으로 치를 메이저대회에서 기록보다는 경험을 쌓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가려는 마인드가 돋보였다.
syl015@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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