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박상현 기자] 대한축구협회가, 아니 한국 축구가 또 하나의 실패 경험을 맛봤다. 단순히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부진한 성적만 갖고 실패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부진한 성적 뿐만 아니라 실패를 성공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개혁 방안이 모색되어야 하지만 감독 등 일부 인사의 사퇴만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구태가 반복되려 한다. 만약 동반 사퇴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몇 년 후, 아니 몇 달 후에도 실패할 것이다.
홍명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10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홍명보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월드컵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드리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망만 드려 죄송하다"며 "한국에 돌아와 많은 반성을 했고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남은 6개월 동안 잘 할 자신이 없었고 선수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 선임과 경질·불명예 퇴진으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 언제까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4강까지 이끈 이후로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였다. 선임이 된 후 명예롭게 물러난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히딩크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은 움베르투 쿠엘류 감독도 '오만 쇼크' 여파로 경질됐다.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도 독일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부진해 자진 사퇴했다. 말만 자진 사퇴였지 사실상 경질이었다.
본프레레 감독의 뒤를 이어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이후 그 역시 재계약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단기 과외선생님'에 그쳤다. 아드보카트 감독에 이어 핌 베어벡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부진과 아시안컵 우승 실패로 국내 여론이 나빠지면서 일본과 3~4위전이 끝난 뒤 곧바로 사퇴했다.
허정무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 진출의 역사를 쓰긴 했지만 남아공 월드컵 이후 다시 한번 한국 축구는 경질, 불명예 퇴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조광래 감독이 그랬고 최강희 감독도 상처만 입었다. 홍명보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부진한 성적의 책임을 모두 감독의 탓으로 돌리면서 한번도 한국 축구의 현실을 제대로 돌아보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술위원회에서 내놓은 보고서는 그저 대회 성적과 상대팀 전력에 대한 분석, 세계 축구의 흐름에 대한 자료만 열거했을 뿐 대표팀 내부의 운영체계나 축구협회의 대표팀 지원 과 운영방안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시계를 더 뒤로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에 0-5로 참패한 뒤 그 책임을 물어 차범근 감독을 현장에서 전격 경질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지는 관계자는 없었다.
허정무 축구협회 부회장과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동반 사퇴하는 형식으로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이는 진정한 책임이 아니다. 사퇴만으로 책임을 다했다며 여론을 무마시키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축구협회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놓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문제가 발생하면 미봉책으로 대처하려는 구습이 반복되고 있다.
홍 감독 본인이 월드컵 현장에서 사퇴의사를 밝혔는데도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설득까지 해서 재신임하는 것으로 책임론을 피해가려 했다.
또 '축구협회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여러 논란이 거듭되자 끝내 홍 감독이 유임 1주일만에 사퇴했다. 여기에 허정무 부회장, 황보관 기술위원까지 동반 사퇴하고 정몽규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행태는 축구협회의 안이한 사태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 대표팀 전력 향상 위해 유명무실한 기술위원회부터 개혁을
정몽규 회장은 취임 당시 기술위원회와 대표팀에 대해 "월드컵에 계속 진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고 한국 축구 발전의 키"라며 "현재 대표팀에 대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기술위원회와 상의해 좋은 성적을 내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술위원회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무실하다.
기술위원회는 명실상부한 한국 축구, 특히 대표팀의 '브레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기술위원회는 감독을 막무가내로 갈아치우기만 했다.
브레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기술위원회가 전략이나 철학 없이 감독을 교체했고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 역시 충분한 검증이 없었다. 하마평에 오르던 외국인 지도자는 단순히 끼워맞춘 들러리였고 가장 편하게 선임할 수 있는 감독만을 데려왔다.
국내 지도자냐, 외국인 지도자냐에 대한 아무런 기준과 평가도 없이 조광래 감독을 선임했고 마음에 들지 않자 전북 현대를 이끌고 있는 최강희 감독을 데려오며 위기를 무마하고자 했다. 홍명보 감독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둘러 선임했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능력있는 외국인 지도자를 차기 감독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다고 해도 다시 한번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국 축구에 가장 잘 맞는 전술을 쓸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검증하고 검토하는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상태라면 단순한 개혁보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빠르다.
이웃나라 일본은 기술위원회를 개혁하면서 FIFA 마스터코스를 이수한 전 일본 축구 대표팀 주앙인 미야모토 츠네야스를 신임 기술위원장으로 내정했다. 젊고 개혁 성향의 인물을 내세워 분위기를 일신하겠다는 것이다.
◆ 축구협회 스스로 공청회·청문회를 열자
현재 정치권에서는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검토와 자질 검증을 통해 얼마나 행정능력이 있는지가 청문회를 통해 밝혀진다.
대한축구협회 역시 청문회가 필요하다. 정치권 청문회는 국회가 주최하지만 축구협회를 청문할 수 있는 단체가 없다. 그렇다면 축구협회가 스스로 청문회를 요청할 수도 있다.
청문회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청회다. 축구협회가 스스로 개혁방안을 찾고 이에 대해 팬과 축구 관계자, 전문가들로부터 검토와 검증을 받는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정몽규 회장이 취임 일성으로 소통과 화합을 강조한 만큼 공청회, 청문회는 이에 딱 맞는다. 축구협회 내부에서 탁상행정식으로 개혁 방안을 정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지도자와 축구계의 모든 목소리를 들어 반영하는 것이다.
축구협회와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단기 플랜도 필요하지만 장기 플랜도 요구된다. 이 플랜을 축구협회 내부에서 토론을 거쳐 결정할 것이 아니라 축구와 관련한 전문가들의 고른 의견과 여론을 함께 들어봐야 한다.
축구협회가 진정한 개혁 의지를 밝히지 못한다면 4년 뒤 이때쯤 아니면 그 중간이라도 감독 사퇴 또는 경질이라는 똑같은 상황을 맞을 것이 뻔하다.
지난 20년 세월이 그것을 말해줬다. 본프레레는 '제2의 쿠엘류'가 됐고 베어벡은 '제2의 본프레레'가 됐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후임 감독이 '제2의 홍명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리고 또 실패했다며 국민에게 고개를 조아릴 것이고 또 유야무야 지나갈 것이다.
이런 행태를 언제까지 계속 할 수는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적기다.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한번에 확 뜯어 고치는 용기도 필요할 때다.
사령탑과 월드컵에 동행했던 임원의 동반사퇴가 책임의 끝이 아니다. 개혁만이 진정한 책임이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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