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11-25 21:48 (월)
[SQ스페셜] 연예매니저와 같다고? 프로스포츠 통역의 모든 것
상태바
[SQ스페셜] 연예매니저와 같다고? 프로스포츠 통역의 모든 것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7.01.06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포츠와 사람들] ① 유학 경험 보유자 대다수... 사실상 개인 매니저 역할

[스포츠Q(큐) 민기홍 기자] “통역 지망생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하나도 없네요.”

스포츠산업 잡페어를 취재하면서 참가자들로부터 3년 연속으로 받은 피드백이다.

2015년 1월 아시안컵 당시 울리 슈틸리케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의 통역관 이윤규 씨가 화제를 모았다. 그는 슈틸리케 감독이 뿔나면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칭찬할 때는 다정한 톤으로 말해 ‘슈틸리케의 분신’으로 불렸다. 잘 다니던 현대자동차를 박차고 나온 배경도 눈길을 끌었다.

배우자나 주장보다 더 감독과 친밀한 사람, 미디어가 주목하는 입을 가진 통역. 이토록 중요한 직군인데 정작 정보가 모자라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니, 그래서 준비했다. 프로스포츠 통역의 세계다.

◆ 어떻게 프로스포츠 통역이 되나?

“아무래도 유학이나 외국 거주 경험이 있는 이들, 어학연수라도 다녀온 분들이 주로 채용되는 것 같아요. 언어의 유창함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때문이겠죠. 영국, 캐나다, 미국 등에서 살다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네요.”

프로야구단 넥센의 2군 화성 히어로즈에서 메이저리그 출신 외국인 지도자들을 돕고 있는 신봉철 씨의 설명이다. 그 역시 미국 명문대 출신. 스포츠가 좋아 업계 진입을 꿈꾸고 있던 터에 포털사이트 카페에 뜬 공고를 보고 지원했단다. 화성 히어로즈가 쉐인 스펜서, 브랜든 나이트, 아담 도나치 등 외국인 지도자를 대거 영입하며 팜 시스템을 개편한 덕을 봤다.

대개 추천으로 이뤄지던 통역 채용은 최근 공개로 전환되는 추세다. 지난해 12월부터 2주간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가 새 식구를 찾는다고 공지했다. KIA와 롯데는 영어, 삼성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자원을 필요로 했다.

구단과 협회, 스포츠마케팅업, 이벤트대행사 등 한 달에 4~5건 꼴로 스포츠 통역 공고가 나고 있다. 물론 국민체육진흥공단 한국스포츠개발원의 잡스포이즈, 스포츠산업 채용서비스 스포츠잡알리오에 공지되지 않고 교수나 업계 관계자의 소개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도 여전히 있다.

희소식은 최근 들어 프로스포츠 통역 채용공고가 급증한다는 사실이다.

김선홍 스포츠잡알리오 대표는 “2년 전과 비교해 보면 꾸준히 채용공고가 나오고 있다”며 “프로구단 창단, 외국인 지도자들의 증가, U-20 월드컵과 평창 동계올림픽 등 메가 스포츠이벤트 개최 등으로 수요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국내 프로스포츠에 외국인 지도자가 늘면서 프로스포츠 통역 수요도 늘었다. 트레이 힐만 SK 감독과 박희수의 대화를 통역하고 있는 김민 매니저(가운데). [사진=SK 와이번스 제공]

◆ 스포츠 통역은 외국어 잘 하는 개인 매니저?

“사실 통역이라기보다는 영어를 잘 하는 ‘개인 매니저’라고 봐야 해요. 투수코치와 함께 마운드에 오르거나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야구장에서 퇴근하는 게 퇴근이 아닙니다.”

프로야구단 한화 이글스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한 해씩 보낸 박재현 씨는 “결혼한 외국인선수를 담당하게 되면 부인이나 자식의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관광지에 동행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며 “안 보이는 곳에서 노력해야 하는 일이 정말 많다”고 귀띔했다.

여자프로농구단에서 통역을 지낸 A씨 역시 “팬들이야 통역사를 감독과, 구단과 가교 역할을 하는 멋진 직업이라 여기겠지만 24시간을 선수들과 함께해야 한다”며 “시즌 중에는 개인 생활이 없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A씨는 “시작과 끝이 운전이라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다. 아프면 병원도 같이 가고 장도 같이 본다. 한식을 못 먹는 예민한 선수의 경우에는 끼니까지도 신경 써야 한다”며 “통역은 사실 연예인 매니저 같은 개념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외국인 선수의 유일한 소통창구이기에 통역은 희생,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 친구로 다가가야 경기력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프로스포츠 통역사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구단 프런트나 감독, 코치와 갈등이 생길 경우엔 몹시 곤혹스럽다고. 옵션이나 지도방식에 불만을 품게 되면 통역이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A씨는 “외국인 선수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도 구단이나 감독의 입장은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며 “그래서 눈치가 빨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 에스밀 로저스를 도왔던 박재현 통역(왼쪽). [사진=스포츠Q DB]

◆ 눈치는 필수, 종목 관련 전문 어휘를 숙지하라

“성적이 잘 안 나오면 안 힘들 일도 힘들어져요. 스포츠 통역도 선수단과 한 몸이잖아요. 구단과 지도자, 선수들과 외국인 선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판이 흘러가는지 알아채는 통찰력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종목에 대한 이해, 관련 어휘 표현법을 익히는 건 필수겠죠.”

여자 배구대표팀 주무와 여자배구단 통역을 지낸 B씨도 A씨와 마찬가지로 ‘눈치’라는 단어를 썼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흐름을 읽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입을 뗀 그는 “또한 외국인이 쓰는 ‘현장의 언어’를 빨리 익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자의 개인적 경험을 붙인다면, 4년 전 지도자 강습회에 일본의 스타 감독이 초청됐는데 통역이 크게 당황해 도중에 교체된 사례를 봤다. 행사 도중 한 지도자가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고 분통을 터뜨렸고 결국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코치가 대신 나서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야구소프트볼 용어를 전혀 모른 전문통역사의 굴욕이었다.

개인 기량이 뛰어난 가드나 포워드를 활용, 1대1을 주문하는 농구의 전술 ‘아이솔레이션’을 통역이 사전적 의미인 ‘고립, 분리, 격리’로 받아들이면 상황은 꼬이기 시작한다. 만일 이를 의역해 제멋대로 전달이라도 하게 되면? 현장에서 쓰이는 표현을 학습해야 하는 이유다.

▲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프로스포츠 통역은 선수단과 함께 움직이는 프런트 직원이다. [사진=스포츠Q DB]

◆ 프로스포츠 통역, 비정규직의 비애

“연봉이 10개월로 나뉘어 지급됩니다. 비시즌에는 일이 없다보니 일거리를 찾게 되죠.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요. (웃음) 프로야구 선수들의 비활동 기간인 지금은 영어를 쓸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 하고 있습니다.”

신봉철 씨가 털어놓은 고민이다. 

박재현 씨는 “시즌이 끝나갈 때쯤이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걱정이 앞선다”며 “사고를 치지 않으면 계약 연장은 된다지만 늘 고용 불안에 시달리니, 프로스포츠통역사는 장기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기는 분명 힘든 직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어가 되는 고급인력을 계약직으로 품고 가야 하는 구단 입장도 이해는 간다. 한 해 한 해 어떤 외국인을 쓸지 모르는데 그의 파트너인 통역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기는 쉽지 않다. 유네스키 마야(전 두산)나 카도쿠라 켄(전 SK, 삼성), 괴르기 그로저(삼성화재)처럼 스페인어나 일본어, 독일어를 쓰는 외국인을 영입하면 새 인력을 뽑아야 한다.

그래서 프로스포츠 통역 중에는 국제 업무나 홍보, 마케팅 등 다른 역량을 갖추려 노력하는 이들도 적잖다. A씨는 “구단마다 다르긴 하지만 농구, 배구처럼 사무국 규모가 작으면 멀티 역량을 갖추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드물긴 해도 3년 이상 버티다 정식 프런트로 ‘승격’되는 경우도 있다.

▲ 프로스포츠 통역은 현장의 용어를 완벽히 숙지하고 감독의 의중을 잘 전달해야 한다. 농구단 부산 kt의 김병일 통역(오른쪽 두번째). [사진=KBL 제공]

◆ “아무리 힘들어도, 프로스포츠 통역은 매력적”

그래도 프로스포츠 통역은 아주 매력적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힘든 게 아무리 많아도 더그아웃에서 선수단과 호흡한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죠. 외국인 선수들과 네트워크도 만들고요. 많은 노력, 희생이 필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죠. 값진 경험을 갖게 되는 직업입니다.” (박재현 씨)

“개인 시간이 없으니 제대로 못 쉬죠. 돈 쓸 시간이 없는데다 구단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니 돈 나갈 일이 없어요. 통장 잔고에 돈이 쌓이던데요. (웃음) 외국인 선수의 심리적 안정이 경기력으로 전달될 것이라 믿어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전력분석도 도와요. 외국인 선수의 활약으로 팀이 이기고 성적으로 나타나면 그만큼 기분 좋은 게 없어요.” (A씨)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누구보다 가까이서 프로스포츠를 지켜보면서 잘 하는 외국어를 구사해 돈까지 벌다니. 리그 판도를 좌우하는 슈퍼스타가 인터뷰를 통해 ‘통역 덕’이라고 공을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리 고되더라도 프로스포츠 통역은 아주 멋진 직업임에 틀림없다.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관련기사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