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이름 없는 영웅, 그럴 가치가 충분함에도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을 뜻하는 말이다.
박지성은 스포츠계 대표적인 언성 히어로다. 영국 스포츠 전문 매체 스카이스포츠는 지난 12일 은퇴한지 2년 7개월여 돼 가는 박지성의 근황을 소개했다. 박지성이 세계적인 수준의 축구스타도 아닌데다 영국 대학에서 공부 중인 근황이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데 이같은 보도가 나오자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드러낸 이들도 없지 않다.
어쩌면 이는 박지성의 진가를 잘 모르는 이들의 대체적인 반응이 아닐까? 웨인 루니 등 박지성의 옛 동료들은 박지성을 두고 “가장 저평가된 동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언성 히어로로 통하지만 박지성의 진면목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박지성이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헌신’이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팀에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자처했고 이런 면이 박지성을 빛나게 했다.
국내 스포츠계에도 박지성 못잖게 꿋꿋이 제 역할을 하며 자신보다 더 팀을 빛나게 하는 언성 히어로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땀과 눈물의 현장을 조명해 보자.
# ‘찰거머리 수비-멀티 플레이어’ 최철순, 최강희의 남자로 우뚝 서다
축구에서 가장 궂은일을 담당하는 포지션은 수비와 수비형 미드필더 등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공격수들에 비해 상대팀 주요 선수를 전담마크하거나 공격과 수비를 쉴 새 없이 오가며 많은 활동량으로 묵묵히 동료들을 도와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를 가리지 않고 해내는 선수가 있다. 전북 현대 최철순(30)이 그 주인공이다.
최강희 전북 감독은 지난해 11월 아시아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 알 아인(아랍에미리트)과 1차전에서 ‘최철순 시프트’를 가동했다. 상대 에이스인 오마르를 막기 위한 전략 카드는 정확히 들어맞았고 이는 전북이 아시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최강희 감독은 당시 경기 후 “최철순이 오마르를 완벽히 봉쇄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시즌 K리그 클래식에서 전북과 막판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였던 FC서울의 황선홍 감독은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전북과 최종전을 앞두고 “철순이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우리 전술 구상도 바뀔 것”이라고 ‘최철순 경계령’을 내리기도 했다.
최강희 감독은 종종 최철순 시프트를 사용했다. 그만큼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클럽월드컵에서 스리백을 가동할 수 있었던 것도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100% 해내는 최철순이 있기에 가능한 시도였다. 2006년 전북 입단 후 원 클럽 맨으로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최철순의 다재다능함과 희생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 디펜딩 챔피언 오리온의 핵심, ‘두목 호랑이’ 이승현의 존재감
고양 오리온 이승현(25)이 최근 득점 1위 애런 헤인즈의 복귀전에서 발목 부상으로 쓰러지자 일각에서는 “헤인즈의 공백보다 더 뼈아프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만큼 이승현이 팀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절대적인 까닭이다.
지난 시즌 14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오리온은 골밑에서 이승현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헤인즈는 팀의 최고의 강점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정통센터가 아닌 헤인즈는 내, 외곽을 넘나들며 뛰어난 기술로 상대를 압도한다. 막강한 공격력과 달리 수비에서는 아쉬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훌륭하게 메워주는 것이 이승현이다.
이승현은 신장 200㎝가 훌쩍 넘는 외국인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오리온이 지난 시즌 챔피언에 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즌 MVP는 양동근의 몫이었지만 추일승 고양 오리온 감독은 “이승현이 단연 올 시즌 MVP다. 1년 동안 골밑에서 외국인 선수들을 상대로 얼마나 고생을 했나”며 이승현을 향해서 만큼은 늘 칭찬을 입에 달고 산다.
이승현의 올 시즌 기록은 평균 10.72점 6.8리바운드. 화려하진 않다. 오히려 눈여겨 볼 것은 출전시간이다. 데뷔 시즌 33분, 지난 시즌 35분을 훌쩍 넘겼던 이승현이다. 올 시즌에도 33분 넘게 코트에 나서고 있다. 상대 빅맨을 막는 이승현의 숨은 공로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 긴 출전시간이다. 이승현이 코트를 비울 경우 제대로 그 역할을 해낼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올 시즌 승률 0.656(21승 11패)을 기록, 3위에 올라 있는 오리온이지만 이승현이 부상으로 이탈한 뒤 3경기에서 1승 2패로 부진했다. 이승현이 없는 동안 오리온이 어떻게 버텨내느냐에 따라 올 시즌 팀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역할 자체가 조연, 리베로 그 자체 여오현
배구에는 독특한 포지션이 있다. 유니폼 색깔부터 다르다. 수비 전문 선수 리베로다. 공격에는 가담할 수 없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역할만 담당하는 살림꾼이다. 리베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바로 천안 현대캐피탈 여오현(39)이다.
홍익대를 졸업하고 2001년 대전 삼성화재에 입단한 여오현의 이력은 화려하다. 2013년 현대캐피탈로 이적한 여오현은 10여 년간 국가대표 리베로였다. 2002년 부산,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V리그에서는 2011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수비상, 베스트7, 리베로 상, 올스타 MVP까지 차지한 이력이 있다. V리그 10주년 올스타 명단에 최다득표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플레잉 코치로 뛰고 있는 여오현은 디그뿐 아니라 리시브에서도 안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또 유사시에는 세트에도 관여해 공격을 돕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외국인 선수 톤 밴 랭크벨트의 부진으로 수비 범위까지 넓어졌다. 감독으로서 든든하기 이를 데 없는 선수다. 플레잉 코치직을 맡긴 것만 봐도 최태웅 감독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캐피탈은 정규리그 2연패에 도전하고 있지만 경쟁 팀들에 비해 외국인 선수의 무게감이 가장 떨어진다. 교체까지 고심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캐피탈이 인천 대한항공에 이어 2위를 달릴 수 있는 것은 여오현을 중심으로 한 수비진이 잘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 묵묵한 주장 김재호, 두산-대표팀 숨은 살림꾼?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로 불린다. 거의 대부분의 플레이가 수치화돼 선수의 가치에 대해 세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럼에도 ‘스탯’이 아직까지 완벽한 선수 가치 증명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선수들이 있다. 두산 베어스 김재호(32)가 그 중 하나다.
두산 ‘캡틴’ 김재호는 지난해 두산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이와 함께 유격수 골든글러브 2연패의 영광도 함께 누렸다. 사실 논란은 있었다. 김재호는 타율 0.281에 OPS(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것) 0.835를 기록했다. 김하성(넥센 히어로즈)과 오지환(LG 트윈스)은 2할8푼 대 타율로 정확성은 조금 떨어졌지만 20홈런 80타점에 가까운 기록들로 타격에서는 김재호에 비해 더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수비에서 안정감은 김재호가 우위였다. 김하성이 21개, 오지환이 17개의 실책을 범하는 동안 김재호는 10개의 실책에 그쳤다. 수비에서 유격수는 가장 많은 공을 받고 어려운 타구를 처리해야 하는 위치다. 유격수 골든글러브 부문은 명확한 기준이 없어 늘 논란의 중심이 되곤 하지만 김재호의 수비력에 대해서 논란이 일었던 적은 없다.
이러한 능력은 기자단 투표가 아닌 현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2015년 말 열린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SBC) 프리미어12에 나섰던 김재호는 안정적인 수비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올 3월 열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 팀에도 발탁됐다.
두산은 지난 시즌을 마치고 김재호가 자유계약선수(FA)로 시장에 나오자 스토브리그 첫 번째로 계약을 체결했다. 4년 총액 50억 원. 김태형 감독은 팀에 잔류한 김재호에게 주장직 연임을 요청했다. 안정감 있는 수비만큼이나 주장으로서 얼마나 팀을 잘 이끌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포츠에서는 주로 득점에 기여하는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다. 하지만 그들이 있기까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숨은 공신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있기에 스포츠는 더욱 멋지고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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