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12-23 12:20 (월)
[챌린지 2015] (22) 여자경보 레전드 꿈꾸는 전영은, 외로운 행보 멈추지 않는 이유
상태바
[챌린지 2015] (22) 여자경보 레전드 꿈꾸는 전영은, 외로운 행보 멈추지 않는 이유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5.05.08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미정 잇는 '걷기의 달인' 전영은…'발톱 빠지고 알 배겨도 나는 걷는다'

[300자 Tip!] 걸어가는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경보는 일반인에게 매우 까다로운 운동이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앞선 발은 뒷발을 지면에서 떼기 전에 지면에 닿아야 한다. 몸을 받치는 다리는 신체를 수직으로 세운 자세에서 적어도 한순간은 곧게 펴야 한다. 경기 중에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경고를 받는다. 마라톤만큼 체력 소모도 상당히 크다.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 20㎞ 동메달리스트 전영은(27·부천시청).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국 경보의 밝은 내일을 위해 걷고 또 걷는 그는 이름하여 ‘걷기의 달인’이다.

[부천=스포츠Q 글 이세영·사진 이상민 기자]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지만 전영은은 최근 자신의 20㎞ 최고기록을 또 한 번 갈아치웠다. 지난 3월 15일 일본 노미에서 열린 아시아 20㎞ 경보선수권대회에서 1시간30분35초에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것. 중국, 일본 선수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전영은은 “세계선수권대회가 올해 아시아에서 개최되는데, 전초전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좋은 기록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 한국 여자경보의 '간판' 전영은이 부천종합운동장 트랙을 사뿐히 걷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을 넘어선 전영은은 김미정이 갖고 있는 한국기록 1시간29분38초에 57초차로 접근했다. 전영은의 선전에 신임식 부천시청 감독은 “신체능력이 최고조에 오른 만큼 조만간 한국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르면 8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달성할 것”이라고 웃어보였다.

놀라운 행보다. 메이저대회 데뷔전인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1시간40분24초(5위)를 기록한 전영은은 이듬해 대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분 가량을 단축, 1시간35분52초(26위)를 기록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실격 처리돼 아쉬움을 삼켰지만 이듬해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시간34분29초(40위)를 기록,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1시간33분18초로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여자경보 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가 됐다.

성인 대회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한 전영은은 문자 그대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이미 국내에는 그의 적수가 없는 상황. 남은 건 7년째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기록을 경신하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 메이저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다.

▲ 실업팀 여자경보 선수가 단 6명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영은은 묵묵히 한 길을 걷고 있다.

◆ 한국 여자경보 실업선수, 단 6명에 불과

한국 여자경보는 비인기 종목 중에서도 변방에 있다. 전국에서 20㎞ 경보를 뛰는 실업팀 여자선수가 단 6명밖에 없다. 그나마 부천시청에는 전영은과 팀 후배 이정은이 함께 있어 사정이 낫지만 다른 팀에는 한 명씩밖에 없기 때문에 기록 단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실업팀에 6명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10㎞ 레이스를 펼치지만 성인이 된 뒤 거리가 20㎞로 늘어나기 때문. 국제대회 정식정목에는 10㎞가 포함돼 있지 않다.

“여고부에 20㎞ 종목을 신설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여고선수가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또 실력이 좋아도 실업팀에서 받아주지 않아 선수생활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영은의 말처럼 저변이 좁다보니 선수들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축구, 야구 등 인기종목과는 달리 육상 실업팀에는 선수들의 몸 관리를 책임지는 트레이너가 없다. 이에 선수들이 개인적으로 마사지를 받는 등 알아서 몸 관리를 하는 실정이다. 전영은은 “전담 트레이너의 도움으로 선수들이 자신의 몸 상태를 꾸준히 체크하면 기량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달리 일본, 러시아 등 육상 강국은 경보학교가 있을 만큼 저변이 넓다. 특히 일본의 경우 5㎞ 청소년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만 100명에 달할 정도로 대중화됐다. 기록이 비슷한 선수가 많아 그 안에서 경쟁력이 생기고 우수한 선수들이 적잖이 배출되고 있는 것. 육상 선진국의 경보는 선순환을 그리고 있다.

▲ 신임식 감독(오른쪽)과 포즈를 취한 전영은. 신 감독은 "지구력만 기른다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 최고기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발톱이 빠져도 경보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대전 대암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을 시작한 전영은은 처음엔 800m를 뛰다 대전 신일여중에 입학한 뒤 경보로 전향했다.

언니들이 걷는 모습이 멋져 보여 경보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온몸에 알이 뱄다. 골반이나 무릎, 허리, 엉덩이에 심한 무리가 간 것.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았지만 전영은에게 포기란 없었다. 일주일에 거리주 훈련(20㎞를 넘는 거리를 걷는 훈련)으로 60㎞를 걷는 강행군에 발톱이 빠지고 허벅지에 통증이 올라와도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신임식 감독은 “선천적인 재능은 남보다 떨어지지만 정신력은 타고났다”며 “승부욕이 강하기 때문에 세계대회에서도 성과를 내는 것”이라고 전영은의 승부사 기질을 칭찬했다. 비록 부모님으로부터 월등한 운동신경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전영은은 경보의 매력으로 한 명씩 제칠 때 오는 쾌감을 꼽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루할 수 있지만 순위가 올라갈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함을 느낀단다. 수십 명이 출전하는 국제대회에서 쾌감을 맛본다는 전영은이다. 이것이 그가 경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 전영은은 현역 은퇴 후 지도자로서 끊어져가는 여자경보의 명맥을 잇겠다고 다짐했다.

◆ "여자경보 명맥 잇는 지도자 될 것"

전영은의 경보 롤모델은 한국 여자경보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국기록 보유자 김미정(36)이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전국체전 포함 각종 국내대회를 석권한 김미정은 2008년 결혼과 함께 은퇴한 뒤 4년 후 전격 복귀, 그해 전국체전에서 우승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전영은은 김미정에 대해 “아기를 낳고 체형이 바뀌었는데도 기록이 잘 나왔다. 복귀한 뒤 후배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운동한 걸로 아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다”라고 말했다. 2012년 김미정의 전국체전 기록은 1시간33분20초로 자신의 최고기록에 3분42초밖에 뒤지지 않았다.

또 다른 레전드가 되기 위해 앞으로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까. 전영은은 “20㎞ 경기를 하면 12㎞ 지점에서 몸에 이상신호가 오더라”며 “거리주 훈련으로 보완하겠다”고 다짐했다. 신임식 감독도 “유연성과 지구력을 기르는 훈련을 앞으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기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직 선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현역 은퇴 후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전영은은 경보의 저변 확대를 위해 지도자를 고려하고 있다.

“선수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대회를 볼 게 아니라 먼 미래를 보고 선수를 키우고 싶은 게 제 소망입니다.”

전국에 뛰는 실업 선수가 6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저변이 좁은 여자경보. 언제 명맥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선수층이 얇지만 전영은은 내일의 영광을 위해 걷고 또 걸을 참이다.

[취재후기] 인터뷰 내내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에 답했다. 경보를 통해 인생이 바뀌었다는 전영은은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게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당초 25세 때까지만 경보를 하려 했으나 특유의 긍정 에너지가 선수생활을 지속하게 했다는 것.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새삼 강하게 와닿은 인터뷰였다.

▲ 전영은이 부천종합운동장 광장에 위치한 엄지 동상에서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syl015@sportsq.co.kr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관련기사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