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큐) 박용진 편집위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8일) 오전 돌연 故 하일성 씨의 비보를 접하고 무슨 말부터 꺼내야 될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 같다. 하일성 씨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면 여전히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용진아!’하며 대꾸해 올 것 같다. 비보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고인과 필자는 출신 고교는 다르지만 같은 해 졸업한 동기생이다. 필자가 고인과 처음 만난 것은 꼭 50년 전이었다. 고교 3년 시절이던 1966년, 수유리 상업은행 야구장에서 열린 선린상고와 성동고 간 서울시 예선전에서였다. 하일성은 유격수로, 필자는 3루수로 출전했다. 고인과 필자가 야구선수로 만난 것은 그 경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유격수로 상당히 빠릿빠릿했던 선수였다는 기억이 난다.
하일성 씨는 한국야구계에 크나큰 족적을 님긴 분이다. 고인은 경희대로 진학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고교 체육교사와 방송해설을 했다. 고인은 평생을 야구와 함께하며 야구팬들에게 야구를 쉽게 이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아무리 복잡한 야구 룰도 고인의 입담과 표정을 거치면 쉬워졌다. 야구를 잘 모르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야구를 알게해 준 안내자였다.
고인은 친화력이 뛰어나 항상 주변에 사람이 몰렸다. 유머가 뛰어나 고인과 함께 있으면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마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야구해설가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절 중년 아주머니팬들이 많았던 이유도 그런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비보을 접하고 나니 충격을 받아 머리가 멈춘 것 같았다. 그동안 야구계에서 함께지내며 맺었던 많은 인연들을 떠올려 보려했지만 뭔가로 강하게 얻어맞은 듯 머리는 띵하고 이명이 생긴 듯 귓가에는 이상한 소리만 맴돌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간신히 진정을 하고 나니 고교시절부터 KBO 사무총장 시절에 있었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고인은 필자와 만날 때마다 “용진아! 잘 지내지?”하며 따뜻하게 말을 먼저 거는 다정한 친구였다. 언제나 따스함이 몸에 배어 있는 인정 있는 사람이었다.
고인은 야구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자존심을 내려놓고 항상 물어보고 곧바로 해설할 때 사용하는 겸손함도 있었다. 남을 인정할 줄 아는 포용력도 겸비한 분이었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치솟는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
고인은 한국야구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KBO 사무총장 시절 산적한 난제들을 풀면서도 한국프로야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고 싶다며 노심초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무총장을 마칠 즈음, “이제는 한국프로야구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온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개인의 일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고인은 사무총장 시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전화해 “용진아, 밥 먹자”고 연락이 오곤 했다. 막상 만나고 나면 90%이상 혼자서 말을 했다. 매번 마지막은 “그런데 뭐 특별한 일은 없어, 잘 되겠지. 고마워”라고 끝맺곤 했다. 그 말을 그냥 듣기만 하고 왔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일성아! 하늘나라에서도 이곳에 있을 때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게. 잘 가게, 일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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