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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국정농단' 최순실 게이트, 100년 후 후세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록할까?... 박근혜-최순실, 100여 년 전 명성황후-진령군 연상시켜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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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국정농단' 최순실 게이트, 100년 후 후세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록할까?... 박근혜-최순실, 100여 년 전 명성황후-진령군 연상시켜 기시감
  • 류수근 편집국장
  • 승인 2016.11.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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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류수근 편집국장] “조선 양반의 행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솔선수범한 로마 귀족과 극명히 대조된다. 로마제국이 1000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요인으로 로마인들의 포용력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이 가장 중시한 미덕은 명예였다고 한다. 귀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포용, 양보 등의 행태도 명예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정병석이 지은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시공사) 속의 구절이다. 이 책은 조선이 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제도적인 측면에서 명징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폐쇄적이고 착취적인 제도의 문제가 결코 조선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현대에도 적용되는 유효한 관점이라고 보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뒤흔든 2016년 대한민국,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대한민국은 왜 강해졌는가’와 ‘대한민국은 왜 무너졌는가’, 두 제목 중 100년 후의 우리 후세 사가들은 어떤 쪽을 선택할까?

필자는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책을 접한 뒤 그동안 조선의 쇠퇴와 멸망,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굴곡의 역사에 대한 불가해한 의문점이 구름 걷히듯 풀렸다. 그와 동시에, 조선 말기의 상황이 작금의 대한민국과 오버랩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는 조선시대를 말할 때 ‘조선 왕조 500년’이라고 흔히 뭉뚱그려 표현하곤 한다. 한 왕조가 500년이나 한 나라를 지배했다는 것은 세계 왕조사에서도 돋보이는 기록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강력한 왕조들도 200년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를 포함해 정확히 519년(1392~1910)이지만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고 또 기억하는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가들이 연구하고 집중 분석하는 사건은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만한 큰 사건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후세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만한 큰 사건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저서를 집필할 것이다.

‘청탁금지법’, 이른바 김영란법이 발효됐고, 미증유의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역사책 뒷장의 ‘연표’에 적시될 만한 일대 사건들이다. 여러 모로 2016년 대한민국은 많은 후세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건의 전말을 접하며 후세 사가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까? ‘과거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조상’으로 기록하지 않을까.

조선 말기, 그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

19세기 조선 후기로 되돌아가 보자. 큰 역사적 이정표를 찾아보니 1801년 ‘신유박해’부터 등장한다. 1801년은 잠시나마 실학 시대를 열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1752~1800)가 돌연 승하한 후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른 한 해였다. 이른바 ‘순조-헌종-철종’ 세 임금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로 이어진 세도정권기에 들어선 첫해였다.

나이 어린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가 등극하자 수렴첨정에 나선 정순대비(21대 영조의 계비)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신유박해는 청국인 신부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가톨릭교 박해 사건이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정조 재위(1776∼1800) 시절에는 비교적 관대한 정책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당시 천주교는 명분론과 당파의 이익에 빠진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부패한 봉건 지배에 대항하는 진보적 사상으로서 사회 저변에 퍼져나갔다. 신유박해를 통해 당시 지배세력이던 노론은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 세력은 물론, 장차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진보적 사상가들을 제거하는 계기로 삼았다.

막장의 서막을 알린 1801년, 세도정권기의 개막을 알리다

18세기의 마지막 해인 ‘1800’년과 19세기의 문을 연 ‘1801’년은 바로 접해 있는 해였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극과 극의 시대를 가르는 ‘어둠의 장막’과도 같게 느껴진다.

한 번 바뀐 험상한 물줄기는 조선의 국력을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했고, 왕권은 세도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관료체제는 소수의 권력층 중심으로 강화되면서 중앙과 지방을 불문하고 점점 더 깊고 넓게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세금과 군역으로 버거운 삶을 살던 백성들은 그나마 미미하던 법과 윤리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리 뜯기고 저리 빼앗기며 착취의 늪에 빠졌다.

눌리면 언젠가는 폭발하는 법. 10년 뒤인 1811년(순조 11)에는 농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홍경래의 난이 발발했다.

1839년(헌종 5)에는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인 ‘기해사옥’이 일어나, 54명이 참수되는 등 110여 명이 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제로는 시파(時派)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사건으로, 이후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 갔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에게 지워지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폐단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지방에서는 향촌을 장악한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온갖 술수와 막무가내식 압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 이같은 사회적 배경은 백성들의 자각을 일깨워 진주민란(임술민란·1862년·철종13), 동학농민운동(1984년·고종31)이라는 거센 저항으로 이어진다.

백성을 무시한 왕권강화와 정권 실세 간 갈등이 빚은 비극적 결말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은 당시 경운궁(현 덕수궁) 내 중명전에서 을사오적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로써 조선은 사실상 자주적인 국권을 상실했다. 정동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위치한 중명전은 역사의 비극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사진= 스포츠Q DB]

세도가에 휘둘린 헌종과 철종 시대를 지나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세도가의 힘은 빠졌지만 새로운 국면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쇄국정책을 실시했고, 세계적인 흐름을 잃지 못한 채 병인양요(1866), 병인박해(1866), 신미양요(1871) 등으로 국력을 소모했다.

결국은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1876)를 맺으며 엉겹결에 개항을 하기에 이른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무리하게 통화를 발행하면서까지 경복궁을 중건해 원성을 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여기에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 간의 양보 없는 갈등은 청, 일본, 러시아의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외교의 난맥상을 초래하며 정국을 예측불허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1882), 을미사변(1895) 등의 비극적 사건이 발발했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 고종은 갑신정변(1884)과 갑오개혁(1894)을 통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개혁정책을 폈고, 황제국으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뒤늦게 독립국의 지위를 세계 만방에 떨치려고 분투했지만 만시지탄이었다.

일본 낭인에 의해 궁중에서 황후가 시해 당하고, 임금이 남의 나라 외교 공관(러시아 공관)에 대피(아관파천·1896)해 도움을 청했다.

이후 청일전쟁의 승리자인 일제에 의한 치욕은 한일의정서(1904)·을사조약(1905)에 이어 정미7조약(1907)으로 일사천리로 이어지더니, 끝내 한일병합조약(1910)으로 나라를 잃고 말았다. 극비리에 추진된 헤이그 특사 파견(1907)이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좌초되면서 고종은 사실상 강제로 퇴위 당했고, 조선에게 남았던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져 버렸다. 이렇게 조선왕조 519년은 종언을 고했다.

권신과 간신, 비선실세가 판치는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19세기 말 혼란기의 조선 조정에는 권신과 간신이 판을 쳤다. 이들에게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부의 획득만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때로는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며 제멋대로 권력을 농단했다. 공식적인 권한이 없는 인물이 권력을 잡고 제맘대로 흔들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생각나게 하는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 사건도 발발했다. 무속인 진령군 사건이었다.

진령군은 제정 러시아의 파계한 성직자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비유되는 조선 말기의 무당이다. 라스푸틴은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특별한 신임을 받고 잘못된 예언과 국정 농단으로 제정 러시아의 몰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임오군란 당시 고종의 왕비(명성황후)는 성난 군인들에 의해 목숨이 위태롭자 궁궐을 떠나 충주 장호원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관우의 딸이라는 한 무녀를 만났다. 그 무녀는 왕비의 복위를 의미하는 환궁일을 정확히 예언한 뒤 왕비와 함께 한양에 입성했다. 청나라가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을 중국 텐진으로 납치하면서, 왕비의 시대가 다시 열렸다.

진령군은 왕비의 권력을 등에 업고 궁궐을 제집 드나들 듯 누비며 조정의 인사권은 물론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양천제의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무속인은 칠반천인(七般賤人)의 하나로 여겨지며 천시를 받았으나, 이 무당은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받으며 호사를 누렸다. 그의 아들도 득의양양하게 권세를 휘둘렀다. 진령군이 전횡을 휘두를 때 권력 실세들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주위에서 간과 쓸개를 빼줄 듯 알랑거렸다.

올곧은 선비 황현이 기록한 무당 진령군의 국정 농단과 아첨꾼들

구한말의 시인이자 학자이고 독립운동가였던 황현은 격동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서 '진령군'과 관련된 패악을 소개하고 있다. 황현은 진령군을 ‘요사스러운 무녀(妖巫)’로 규정하고 있다. 그에게 현혹된 왕비(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관제묘(관우의 묘)의 북쪽에 살도록 하면서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북묘부인(北廟夫人)'이라고도 불렸다.

"무당은 무시로 상감(고종) 알현이 가능했으며, 장식을 하고 복장을 갖추어 입으면 상감 내외는 그를 가리키고 웃으며 "참으로 '진령군'답다"고 칭찬하고 금은보화를 무수히 하사하니, 길흉화복이 그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고, 수령이나 감사도 왕왕 그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대신들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다투어 그에게 달라붙어 혹은 자매라 호칭하고 혹은 양아들이 되기를 원했으니,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등은 그중 두드러진 자들이다. 무당의 아들은 김창렬인데 잘 차려입고 외모가 의젓했다." 

'한권으로 읽는 매천야록'(나중헌 옮김, 북랩)에 나오는 진령군과 관련된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진령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고, 그의 권세를 빌리려는 관료들의 아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진령군이 고종과 왕비(명성황후)의 신임을 독차지하자, 의남매나 양아들까지도 자청하며 나선 부패 관료 중에는 조병식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조병식은 동학교도를 탄압하여 동학 농민 운동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황현은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등에서 19세기 당쟁, 세도정치의 폐해, 동학농민전쟁, 일제 침략 항일의병활동 등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조선 세종조 때 명정승이었던 황희의 후손이자 조선 말기 순국지사인 황현은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목숨을 끊는 시인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난적들과, 아예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바친 매국노들도 나타났다. 쓰려져 가는 조선 조정에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며 호의호식했던 왕실의 친인척과 권신들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변신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인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은 대표적인 난적들이다. 을사늑약은 외교권 포기, 통감부 설치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사실상 이때부터 조선은 국가의 주권을 상실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강력한 경고도 무시한 조선왕조

한 나라에 전성기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장기가 있으면 전성기도 있고 쇠퇴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침체기에 다시 일어나 중흥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나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나쁜 시절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나라를 더욱 부강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조선에는 강력한 빨간등이 두 차례나 들어왔다. ‘양란’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과 병자호란(정묘호란 포함)이었다. 하지만 전란이 끝난 뒤에는 또다시 악습을 되풀이하며 나라를 바로 세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의 침입을 받은 임진왜란(1592)으로 전국토를 유린 당했지만, 이후에도 명나라와의 명분론에 빠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람에 병자호란(1636)을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가 아무 대책없이 수도인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삼전도(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에서 청나라 황제(태종)에게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며 항복의식(삼배고구두례)를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 왕조는 유비무환을 전란 직후에만 잠시 외쳤을 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과오를 반복했다. 성리학의 명분과 권력 유지에만 눈이 먼 세도가와 권신에 휘둘린 세도정권기를 거쳐,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 권력암투와 비정상적인 외세 끌어들이기 끝에 끝내 국권피탈에 이르고 말았다.

까도 까도 나오는 ‘듣보잡’ 국정농단의 실상들, ‘판타지아’인가

그후 106년이 지난 2016년 가을,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국민투표로 권한을 부여받은 박근혜 대통령이 ‘권한 밖’의 비선 실세에게 지속적으로 국정 자문을 받았고, 그 실세는 인사권은 물론 각종 이권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법률을 넘어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이 때문에 ‘헌정 중단’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고리 3인방’ ‘팔선녀’ ‘영세교’ 속된 말로 ‘듣보잡’ 이야기들이 밀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판도라의 문을 열자 온갖 추문과 썩은 냄새가 진동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정계와 재계, 스포츠계와 문화계 할 것 없이 전방위로 마수를 뻗쳤음이 밝혀지고 있다.

최순실이라는 인물과 그를 따르는 비선라인의 국정 농단에 나라가 휘청할 지경이다. 해외에서 ‘샤머니즘 숭배’에 휘둘린 대통령이라는 보도까지 나오며 국제적 웃음거리가 됐다. 과거 최순실의 부친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던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에 빗대었다는 미국의 정보보고 사실도 해외 언론에 보도됐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온통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청와대에 들어가 무슨 무슨 실장이니 비서관이니 행정관이라며 위세 좋게 완장을 내보였던 인물들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근함을 내세웠던 이른바 ‘친박’들도 ‘독대는 없었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는다. 아직도 상처 입은 국민보다 대통령을 더 염려하는 정치인도 있다. 온통 ‘허상의 세계’요 ‘거짓의 세계’다. 꿈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형국이 연일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설마 그랬을까?’라며 끝까지 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많은 국민들에게 허탈감과 무력감, 배신감은 이제 임계치를 넘기고 있다.

5%이하로 곤두박질친 역대 대통령 최하 지지율은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방증한다. 이제 ‘하야’ ‘탄핵’이라는 구호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됐고, 전국 곳곳에서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광화문과 청계천 광장에는 수만 개의 촛불이 다시 밤을 비추기 시작했다.

‘국정 농단’ 사건은 과거나 현재나 백성 중심의 ‘진정한’ 정치 실종이 문제의 뿌리다.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어버이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린다는 ‘왕도정치’를 표방했고,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과 2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왕도정치’가 세도가와 권신, 왕실의 친인척에 의해 농락 당했고, 2016년 대한민국은 헌법의 기본정신이 대통령의 후광을 입은 비선실세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부정당하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는 대한민국, 그 출발은 정확한 책임소재 규명과 준엄한 단죄여야 한다

현재 석촌호수 한 켠에 서 있는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굴욕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사진= 스포츠Q DB]

이제부터라도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잘잘못은 낱낱이 밝혀내고, 죄가 있는 사람은 예외없이 준엄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어물쩍 조사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사건을 마무리하려 하거나, 사건의 본질과 몸통을 피한 채 적당히 꼬리 자리기를 한 역사적 전철을 반복해선 안된다. 책임자는 스스로 반성하고 책임을 지고 벌을 받으며 ‘결자해지’해야 한다.

단죄와 함께 백년대계를 위한 재발 방지 대책도 치밀하게 세워야 한다. 급조한 대책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기초부터 초석을 놓는 자세로 튼튼하게 켜켜이 쌓아 올려야 한다. 그 대책의 중심에는 백성이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 불편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고 누구나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공정한 사회를 위해 견제와 균형책을 철저히 마련해야 한다. 

난국을 달변이나 임기응변으로 슬쩍 넘어가려 한다면 쓰디쓴 역사의 경험을 다시 맛보지 말란 법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100년 후 우리의 후세 역사가들은 ‘대한민국은 왜 무너졌는가’라는 제목의 역사서를 쓰며 어리석었던 조상들을 원망하고 책망할 것이다.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본분을 되새기며 당리당략을 버리고 국민들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뜻을 모으고 거국적으로 대응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국민들은 이런 움직임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그에 대한 잘잘못을 냉정한 표심으로 표출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100년 후 후세 사가들이 ‘대한민국은 왜 강해졌는가’라는 책을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6년 최순실 게이트’의 아픈 경험이 대한민국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후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헌신했고, 백성들은 차별 없는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활력이 넘치는 희망사회를 건설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강국이자 부국이 됐다”고 기술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세 사가들이 ‘대한민국은 왜 무너졌는가’와 ‘대한민국은 왜 강해졌는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게 할지는, 결국 지금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그 첫 출발은 국정 농단을 저지른 책임자들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와 가감 없는 단죄에서부터 비롯돼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지도자를 보고 싶다

“정사를 덕으로써 하는 것을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모든 별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억지로 빛나는 별이 아니라 북극성처럼 언제나 한결같이 빛을 발하고 언제나 국민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그런 지도자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가 아닐까?

다음 번에는 꼭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고 인덕과 포용력, 혜안을 겸비한’ 그런 국민의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고, 그런 지도자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세상을 보고 싶다.

<편집자주> 필자는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스포츠·연예 기자, 일본특파원, 연예부장, 스포츠서울닷컴 국장을 거치면서 스포츠와 대중문화의 현장을 두루 취재했다. 무료신문 메트로신문에서 편집국장을, 경제신문 이데일리에서 편집국 부국장을 거치며 정치와 경제, 사회의 속성도 경험했다. 현재 스포츠Q 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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