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스포츠Q 민기홍 기자] “행복합니다. 감독 체질인가봐요. 하하.”
이건열(51) 감독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동국대 사령탑 부임 후 2년간 무려 7번이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행복한 건 자신의 야구철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로에서 몸담았던 지난 13년간, 하루하루를 전쟁같이 보냈다. 그는 2년 전 KIA 타격코치를 끝으로 프로 무대를 떠났다. 2000년 프로 무대에 지도자로 입문한 후 SK, KIA, LG 등을 거쳤다.
그 중에서도 2012년을 빼놓을 수 없다. 너무나도 아파서 잊을 수 없는 해다. 시즌 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KIA는 그 해 타율 0.256(6위), 팀 순위 5위에 머무르며 4강 티켓조차 따내지 못했다.
비난이 쏟아졌다.
이용규, 안치홍, 최희섭, 이범호, 나지완 등 좋은 자원을 갖고도 ‘왜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말이 나왔다. 이 감독은 “내가 잘 못 가르쳤으니 타격 성적이 그렇게 나온 것”이라며 “인정한다. 책임져야 마땅하다”고 덤덤히 말했다.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막강한 팬덤을 자랑하는 KIA 팬들은 타이거즈 홈페이지 공식 게시판 ‘호랑이 사랑방’을 통해 험담을 쏟아냈다. 그는 “광주 시내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창피할 정도였다”며 “사람이 무섭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며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모교 동국대에서 그를 호출했다. 전임 감독의 금품수수 혐의로 야구부 감독 자리가 비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색깔을 입혀볼 수 있는 감독 자리에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야구의 진한 매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10개월간 화순고 감독을 역임했다.
이 감독은 “시골 학교의 16명을 데리고 전국대회 준우승을 한 적이 있다”며 “야구에 대한 애정, 야구인으로서의 사명감 등을 일깨워 준 계기다. 지도자로서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고 아마 무대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배경을 밝혔다.
부임 2년차. 이 감독은 자신이 추구하는 ‘큰 야구, 정직한 야구, 아마추어다운 야구’를 통해 화려한 성적을 내고 있다. 그는 “10년 넘게 완성형에 가까운 프로 선수들만 만지다가 이제 다시 아마추어 선수들의 기본기를 다듬고 있다. 재밌다”고 웃어보였다.
아마야구 감독은 ‘헤드코치’라기보다는 ‘매니저’에 가깝다. 운영팀이 선수단을 관리하는 프로 구단과는 달리 행정에도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케줄을 관리하고 합숙 계획, 재정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 등도 새롭다”며 만족해했다.
그는 현역 시절에만 무려 13번(군산상고 1번, 동국대 4번, 해태 8번)이나 우승을 경험했다. 특히 ‘해태 왕조’에서는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에서 활약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팬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된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이건열이 원조라 할 수 있다.
프로 12년간 통산 타율 0.240(2401타수 576안타), 30홈런 252타점의 성적에서 보듯 이 감독의 선수 시절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포지션별 글러브 서너개를 들고 다니며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구멍이 나는 자리를 메웠다. 포수로도 20경기 정도를 출장했을 정도다.
이 감독은 “나는 야구를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도 잘 하는 선수에 껴서 진학했을 정도”라고 자신을 낮추며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돌아봤기 때문에 선수들 마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지도자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이 감독의 궁극적인 꿈은 무엇일까.
“프로 감독 한 번 해보고 싶죠. 감독 면접 볼 때도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모교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다보면 지도력을 인정받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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