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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너는 너무 직설적이야 [Q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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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너는 너무 직설적이야 [Q리뷰]
  • 나혜인 기자
  • 승인 2023.07.23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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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나혜인 기자] 태초의 인형은 여자아이들을 '어머니'로 기르는 데 사용됐다. 재우고, 먹이고, 인형이 입을 옷을 빨래하는 등 가부장제의 산물로 자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지만 거대한 인형이 등장한다. 이름은 바비. 수영복 차림의 금발 머리 인형은 의사가 됐다가, 우주비행사가 됐다가,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현실과 다른 여성의 세계, 이들의 등장은 앞치마 차림의 여자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을 선사하는 순간이었다. 여기까지가 미국 장난감 회사 마텔 '바비'의 입장이다.

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바비'(감독 그레타 거윅)는 마텔이 만든 허구의 여성 세계, 바비랜드에 살아가는 바비(마고 로비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바비랜드 속 바비는 완벽하다. 알람 없이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고, 아침 샤워 물 온도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정한 온도, 냉장고 속에는 언제나 유통기한이 넉넉한 음식으로 가득하다. 공사장, 법원, 대통령실 등으로 이어지는 일과는 바비들과 서로를 격려하며 완벽하게 해낸다. 밤이면 밤마다 펼쳐지는 댄스 파티와 걸스 나잇(Girl's Night)도 빠지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날마다 매일 같이 최고!"라는 말끝에 "죽는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가 붙기 전까지.

그날 이후 바비는 완전히 달라진다. 부스스한 몰골로 겨우 눈을 뜨고, 입에서는 입 냄새가 나며, 샤워기를 틀자마자 쏟아지는 차가운 물에 깜짝 놀란다. 이어 유통기한 지난 우유에 헛구역질하고 바비 하우스 3층 높이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은 하이힐에 맞춰 올라가 있던 발뒤꿈치가 바닥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바비는 이를 되돌리기 위해 그동안 바비들에게 외면당해 온 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 분)를 찾아간다. 주인의 험한 행위들로 엉망이 된 이상한 바비는 인형 주인이 가진 부정적인 생각이 바비를 불행하게 만든다며 현실 세계로 가 주인을 만나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그렇게 바비는 혹 같은 켄(라이언 고슬링 분)을 달고서 바비랜드 경계를 넘어 현실 세계로 떠난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우주와 설원을 지나 도착한 현실 세계는 바비에게 그야말로 '절망의 세계'다. 바비랜드 속 여성이 맡았던 모든 일을 남성이 대체하고 있고 지나가는 길마다 성희롱이 끊이질 않는다. 여자아이들을 위해 바비랜드를 만들었다 주장하는 마텔조차도 여성 간부 하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바비랜드보다 더 허구 같은 세계다.

마텔의 방해 공작 속에 자신이 찾던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 분)와 만나 바비랜드로 돌아오지만 먼저 도착한 켄이 가부장제라는 바이러스를 퍼트린 뒤다. 가부장제를 만난 바비랜드는 말을 숭배하는 '켄덤(Ken+왕국 Kingdom)'으로 변화하고, 바비들은 남성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에 바비는 원래의 바비랜드를 되찾기 위해 이상한 바비 일당과 글로리아, 사샤(아리아나 그린블랫 분) 모녀와 합심한다.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는 가부장제, 맨박스, 맨스플레인 등 남성 사회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끼치는 해악을 유머로 풀어낸다. 여기에 바비만을 위한 바비랜드, 켄만을 위한 켄덤은 해답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여성, 남성으로 구분된 이분법적 사회의 문제점도 명시한다.

영화 말미에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바비를 통해 맨박스에 갇힌 남성까지 해방시키고, 바비랜드 또한 장식품으로 소모되던 켄을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더 나은 미래로 다가간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말 그대로의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상업영화로서 가지는 재미도 합격점이다. 마고 로비와 라이언 고슬링은 OST에 맞춰 수준급 댄스 실력을 뽐내며 뮤지컬 영화의 재미도 가져간다. 칙칙한 현실 세계와 대비되는 화려한 바비랜드는 눈을 즐겁게 만들고 바비 그 자체인 마고 로비의 착장도 볼거리를 선사한다.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다만 가장 그레타답지 않은 영화라는 점은 반박할 수 없다. 그동안 전한 메시지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직관적인 대사로 풀어내는 방식이 '노담'을 외치는 공익광고와 겹쳐 보인다. '레이디 버드(2018)', '작은 아씨들(2020)'를 통해 그를 알게 된 관객이라면 과도하게 친절한 그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레타 거윅은 왜 이런 방법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상영 등급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비 국내 관람 등급은 12세 이상 관람가다. 미국 관람 등급 또한 PG-13으로 13세 미만 청소년이 관람할 시 보호자 동반이 권고되는 수준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 근거인 해상 경계선 구단선 등장으로 상영 금지 논란을 빚은 필리핀도 PG 등급을 부여했다.

이 밖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보호자 동반 하에 모든 연령이 자유롭게 관람 가능하다. 페미니즘과 사회적 성차별 등이 체화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제공된다는 의미다. 영화는 이들이 사회로 나가 차별을 경험하고 절망하기 이전에 사회가 규정한 성역할이 부당하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바비가 과거 투표권조차 없었던 여성들에게 당신도 의사,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깨달음을 전달한 것처럼 말이다.

바비 핑크에 현혹된 관객들에게 건네는 화려한 핑크색 알약.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으리라.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바비’ 스틸컷.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동시에 여성 목소리를 대변한다. 여성의 외침은 남성과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직설적이다', '날카롭다', '퉁명스럽다', '공격적이다' 등으로 폄하됐다. 만약 바비가 은유로 점철된 부드러운 메시지를 전했다면 남성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적 말하기'에 일조하는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을 세세하게 읊을 정도로 페미니즘은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바비는 눈앞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애써 무시하는 이들 면전에 강풍기를 틀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앞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캐릭터 특성, 은유가 섞인 대사, 소품들로 페미니즘을 풀었다 쉽게 지워지곤 했으니 이제는 누군가 총대를 멜 때도 됐다. 그 총대가 여성에게 해방과 속박을 동시에 선사한 바비라는 점. 이것은 가장 그레타답다.

바비는 전국 영화관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4분. 쿠키영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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