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큐) 류수근 기자]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 태자 부차는 월나라왕 구천에게 부왕 합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섶에서 잠을 자며 칼을 간 끝에 마침내 구천의 항복을 받아냈고, 오나라의 속령이 된 구천은 곁에 쓸개를 놔두고 그 쓴맛을 맛보며 몰래 군사력을 키워 부차를 꺾고 복수에 성공했다. 여기서 ‘섶에 눕고 쓸개를 씹는다’는 ‘와신상담’이 탄생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고통을 인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3월,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2017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종전에 열렸던 세 차례의 WBC와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랐다. 그동안 참가를 꺼려했던 메이저리거들이 대거 참가하며 세력 구도가 요동쳤다. 미국은 4대회 만에 사상 첫 우승을 차지했고, 하위권으로 예상됐던 이스라엘 등이 선전했다. 반면 김인식 감독이 이끈 한국 야구대표팀은 2013년에 이어 2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 WBC 미국전 석패 후 사의 표명에도 '감독 평가' 급상승 중
올해 WBC에서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숙적인 일본 야구대표팀도 큰 주목을 받았다. 2006, 2009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일본은 준결승 전에서 미국에게 1-2로 패하는 바람에 2대회 연속 3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본대표팀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대회 내내 일본 전역이 들썩일 정도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대회 개막전까지만 해도 연습경기에서 패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대회에 접어들자 얼굴색을 180도 바꿨다.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까지 파죽의 6연승을 달렸다.
일본은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던 오타니 쇼헤이(니혼햄)가 오른발목 부상으로 이탈했고, 메이저리거는 아오키 노리치카(휴스턴 애스트로스)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러나 메이저리거가 대거 포진한 미국을 상대로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일본 언론은 WBC 후 일본대표팀을 이끈 고쿠보 히로키 감독(46)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미국 전 직후 나온 고쿠보 감독의 마지막 소감도 느낌이 신선했다.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그는 “패전은 감독의 책임. 여러분들은 잘 했다. 가슴을 펴고 돌아가자”고 선수들을 위로했다.
아쉬움이 남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지만 이길 수 없었던 건 사실. 앞으로 평가는 주위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올해 만46세인 고쿠보 감독은 2013년 10월 9일부터 일본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왔다.
고쿠보 감독의 후임으로 전 요미우리 감독이자 일본국가대표 감독이었던 하라 다츠노리 감독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고쿠보 감독을 연임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
◆ 2015 프리미어12 한국전 투수교체 실패 후 혹독한 비판 받아
16개월 전의 냉정했던 평가를 떠올리면 고쿠보 히로키 감독에 대한 평가는 ‘금석지감’이다. 혹평은 온 데 간 데 없다.
한국 야구대표팀 김인식호는 2015년 11월에 열린 ‘WBSC 프리미어12’ 결승에서 미국을 8-0으로 대파하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당시 한국이 우승하기까지 가장 힘든 고비는 도쿄돔에서 일본과 벌였던 준결승 전이었다. 한국은 4회말 3점을 빼앗겼고, 일본 선발 오타니 쇼헤이의 빠른 볼과 뛰어난 제구력에 짓눌려 7회까지 단 1안타에 그치고, 무려 11탈삼진을 허용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주목하는 일본 현역 최고의 투수인 오타니의 투구는 말그대로 ‘언터처블’이었다. 그때까지 투구수는 85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기의 흐름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고쿠보 감독이 8회부터 오타니를 내리고 구원투수를 올리면서 경기의 물꼬가 정반대로 트였다. 한국 타선은 오타니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3명의 투수를 두들겨 4-3의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한국에게 패하자 고쿠보 감독의 투수교체 실패에 대해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 국내는 물론 대만 언론들도 “오타니는 한국 킬러다. 그런데 왜 최후까지 던지게 하지 않았는가” “일본은 코칭스태프의 손에 의해 패했다”며 고쿠보 감독의 미숙함을 비판했다.
고쿠보 히로키는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시절 바르셀로나올림픽 일본대표로 활약하는 등 아마추어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일본 양대리그의 최고 명문 구단인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8년간 선수로 활약하며 2000안타-400홈런 고지(2041안타 413홈런)를 넘었다. 호크스와 자이언츠에서 주장을 맡는 등 일찌감치 리더십도 인정받았다. 명실공히일본 내 전국구 스타다.
하지만 일본대표팀 감독을 맡기 전까지 코치나 감독 경험은 전무했다. 일본대표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고쿠보 감독의 역량에 지속적으로 의문부호가 붙었다.
◆ 프리미어12 한국전 패배후 '비판 스포츠신문' 구매해 벽에 붙이고 칼 갈았다
고쿠보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과의 프리미어12 준결승 패배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픔이 됐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후일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산케이스포츠에 따르면 고쿠보 감독은 이번 2017월드베이스볼클래식을 앞두고 말그대로 ‘와신상담’했다.
“프리미어에서의 그 분한 생각. 그것이 가장 마음이 남았다.” 평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고쿠보 감독이었지만 당시 한국과 경기에서 패배한 날 밤에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쿠보 감독은 그 분한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한 결의 실천에 들어갔다. 프리미어12에서 감독의 투수교체 실패를 언급한 스포츠 신문을 모두 구매해, 자신의 집 서재 벽에 붙였다. 뿐만 아니라 유명인들의 리더십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매일 한 시간씩 러닝을 할 때에도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한 각계 리더들의 강연회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뛰었다.
고쿠보 감독의 이같은 ‘와신상담’ 방법은 일본 에도막부시대를 열었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의 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실행했다고 한다.
1573년 1월, 도쿠가와 군은 일본 중부인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 당시 승승장구하던 다케다 신겐 군에게 대패했다. 겨우 목숨을 건져 하마마츠성으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화가를 불러 자신의 초췌하고 찡그린 표정을 있는 그대로 그리게 했고, 이 초상화를 보면서 원수를 갚을 날을 준비했다.
고쿠보 히로키는 ‘리더란 무엇인가?’ ‘지도자란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캐물으며 이번 WBC대회에 임했다. 그리고 우려에도 불구하고 1,2라운드에서 6연승을 거뒀고, 비록 1-2로 패하긴 했지만 막강한 전력의 미국 전에서도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코치의 경험이 전무했던 고쿠보 감독은 와신상담하며 자신을 갈고 닦은 덕분에 마침내 지도자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일본대표팀을 그만둔 고쿠보가 앞으로 어떤 모양새로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할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고쿠보 히로키 감독이 장차 일본 프로야구 지휘봉을 잡는다면 어느 구단이 될까? ‘미스터 호크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호크스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점에서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소프트뱅크에는 고쿠보의 영원한 스승인 오사다하루(왕정치)가 회장으로 있다. 그러나 일본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사령탑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쿠보는 소프트뱅크에서 요미우리로 이적했을 당시 4번 타자와 캡틴을 맡은 바 있다. 현역 감독들이 삐끗하면 언제든지 유명 구단의 사령탑에 고쿠보라는 이름이 오를 수 있다.
프리미어12에서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 야구대표팀에 무릎을 꿀었던 고쿠보 히로키. 그가 일본대표팀 감독으로서 겪은 좌절과 와신상담, 그리고 반전 에피소드는 WBC에서 2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의 고배를 마신 한국 프로야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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