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류수근 기자] ‘생의 마지막 순간, 마주하게 되는 것들.’ 지난 2012년 8월 국내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북미 최고의 치유심리학자 기 코르노가 실제로 림프종 4기 진단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은 것들을 기록한 자전 스토리다.
죽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도 한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병마와 싸운 하루하루를 기록한 이 책에는 죽음 앞에서 깨달은 인생의 참 의미가 담겨 있다. 이별, 상실, 고통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마음의 회복이라는 진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책에서 기 코르노는 특별한 충고나 처방을 제시하기보다는 겸손하고 인간적인 자세로 질병이 가진 심리적, 정신적 의미를 발견하고 각자의 능력을 찾아내서 삶을 찬미하라고 권유한다.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공포 앞에서도 담담하게 적어나간 인생의 혜안과 통찰은 읽는 이에게 짙은 감동을 전해준다.
인간이란 한없이 약한 존재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를 갖고 떵떵거리며 세상을 살던 사람일지라도 미세한 현미경으로 들여봐야 비로소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마이크로 병균 하나에 패해 생을 마감하는 게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과 마주쳐야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생의 마지막 순간, 마주하게 되는 것들’보다도 더 생생하게 인생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혜안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 11일 오전 수많은 동료 선후배들과 팬들의 배웅 속에 하늘의 품에 안긴 ‘영원한 배우’ 故 김영애(1951년 4월~2017년 4월)다.
지난 9일 오전, 돌연 故 김영애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1990년대 초반 방송담당기자 시절 스튜디오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기도 하고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기에 비보를 듣는 순간 아련한 기억과 함께 가슴이 뭉클해졌다.
몇 년 전부터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은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터지만 고인의 비보가 믿기지 않았던 것은 최근까지 우리에게 비친 변함없는 모습 때문이었다. 20여 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최근 종영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도 여전히 맑고 고운 자태와 청량한 음색을 보여줬다.
췌장암은 여러 암 중에서도 특히 고통스러운 악성종양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라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몰아치고, 때로는 의식을 부여잡기 조차 힘든 섬망이라는 증상이 몰려온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참고 그토록 변함없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었을까?
KBS2 TV 주말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은 지난해 8월 27일 첫 방송을 시작해 지난 2월 26일까지 모두 54부작으로 방송됐다. 이 드라마에서 故 김영애는 양복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았던 이만술(신구 분)의 부인 최곡지 역을 맡았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최곡지 캐릭터 설명란을 보면 ‘예쁘장하고 곱상한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 깐깐하고 꼬장꼬장하며 고집이 세다’고 설명돼 있다. 이 한 문장의 설명만 봐도 보통 연기자가 소화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외모에는 생기가 있어야 하고 연기는 개성이 넘쳐야 하는 역할이었다. 췌장암 말기의 환자가 소화하기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캐릭터였다.
하지만 故 김영애는 병색을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작품을 끝까지 마쳤다. 마지막 순간까지 완성도 높은 몰입연기를 펼쳤다.
이 초인적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공연했던 신구, 차인표, 오현경 등 선후배·동료 연기자들의 후일담을 전해듣고서야 비로소 고인의 그 경이로운 연기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합뉴스가 배우 차인표에게 제공받은 영상을 토대로 제작한 유튜브 동영상 '故 김영애 마지막 촬영현장...드라마 끝날 때까지만 살아있게'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을 무사히 끝내기까지 막후에서 ’목숨을 건 연기‘를 펼친 대배우의 연기혼이 어느정도 불사신 같았는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영상의 시점은 지난 2월의 어느날. 차인표의 인사말과 함께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마지막 촬영을 마친 故 김영애가 스튜디오를 나서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한방울의 연기혼까지 불태운 故 김영애는 혼자서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했고, 얼굴에는 핏빛 마저 사라진 백짓장의 모습이었다. 고인이나 그를 부축하는 후배 연기자나 머지않아 닥쳐올 작별을 예감한 듯 숙연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故 김영애는 남편 역을 맡았던 신구와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동료후배들에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손을 흔들며 촬영현장을 뒤로했다.
차인표는 고인이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 끝날 때까지만 살아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고 전한다. 의료진은 촬영을 당장 그만두라고 했지만 주위와 시청자들에게 자신으로 인해 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끝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다 정리해서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지막 촬영 이후 고인은 하나둘씩 신변정리를 하고 손수 영정사진과 수위를 마련하는 등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숭고함이 느껴지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공교롭게도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 방송된 6개월 동안은 대한민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소옹돌이가 몰아친 격정의 시기였다. 이 기간 우리들은 거짓·부패·권력남용·뇌물 등 진정성과 정반대의 현실과 끝없이 싸워야 했다. 가장 우리를 슬프게 했던 것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인지 모르는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위선을 접했다. 이들은 ‘약속’의 무거운 의미를 털솜처럼 가벼운 말장난으로 만들어 버렸다.
故 김영애의 지난 반년은 대한민국 위정자들의 거짓과 교차되며 더 큰 울림을 준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주위와 시청자들에게 ‘폐’와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의료진의 만류에도 목숨 건 연기혼을 불살랐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故 김영애가 연기한 최곡지의 한결같은 꼿꼿함은 ‘장인의 양복점’을 지키는데 밑거름이 됐다. 최후의 순간까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고인의 ‘장인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더욱 가슴 찡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진흙탕에 빠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준 건 연기였습니다." 2015년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공로상 수상 당시 고인이 했던 소감이다.
끝까지 주위와 시청자들과의 ‘약속’을 지킨 ‘진정한 연기 장인’. 혼란의 대한민국에 故 김영애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가 소중히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배려와 진성성, 약속 그리고 장인정신’
故 김영애는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고인이 남긴 진정한 삶의 가치들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참된 치유'가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고 있다. 고인이 남긴 수많은 작품 속의 다채로운 모습들과 함께.
"저는 배우인 게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다음 생애에도 배우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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