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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웃사이더들의 엘레지 '유나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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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웃사이더들의 엘레지 '유나의 거리'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6.22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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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용원중기자] 대부분의 드라마가 강박적으로 끼워넣는 재벌가 사람들이나 본부장·검사·변호사·의사·디자이너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원로 건달, 소매치기, 조직폭력배, 콜라텍 사장, 일용직 노동자, 노래방 도우미, 연극배우 지망생, 꽃뱀이 저마다의 짠한 사연을 토해내며 관계를 맺는다.

‘밀회’의 뒤를 이어 방영 중인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는 서울 변두리 다세대주택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서민들의 만화경이다. ‘한지붕 세가족’ ‘형’ ‘서울뚝배기’ ‘서울의 달’ ‘짝패’의 김운경(60) 작가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하층부를 형성하는 소외된 사람들에 천착한다. 그들을 통해 성공과 삶의 가치를 묻는다.

▲ '유나의 거리'의 안내상 조희봉 강신효 김옥빈 이희준 이문식 정종준(왼쪽부터)[사진=JTBC 홈페이지 캡처]

◆ 주변부 인간군상의 짠한 사연,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눈길

가진 거라곤 불알 두 쪽과 착한 심성 밖에 없는 서른 살 창만(이희준)이 다세대주택에 입주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꾸려가다가 집주인의 콜라텍 영업사원으로 취직한다. 창만의 앞방에 사는 유나(김옥빈)는 뛰어난 소매치기다. 전설의 소매치기 강복천(임현식)의 딸로, 소매치기 남수(강신효)와 함께 새로 팀을 꾸린다. 한 방에 사는 미선(서유정)은 유부남과 ‘붙어먹는’ 꽃뱀 카페 여주인이다.

옆방 사는 칠쟁이 칠복(김영웅)과 콜라텍 도우미 혜숙(김은수)은 가난하지만 금슬 좋은 부부다. 문간방 장노인(정종준)은 한때 전국구 조폭으로 명성을 떨친 일명 ‘쌍도끼’다. 오갈 데 없어진 그를 과거 그의 부하였던 콜라텍사장 한만복(이문식)과 홍여사(김희정) 부부가 거둬들였다. 홍여사의 남동생인 개장수 출신 계팔(조희봉)은 ‘개삼촌’으로 불린다. 만복의 뒤치다꺼리를 도맡는다. 유나의 소매치기 선배인 양순(오나라)은 손을 씻고 전직 강력계 반장 봉달호(안내상)와 노래방을 운영하며 짬짬이 도우미로 나선다.

▲ '유나의 거리' 캐릭터 포스터[사진=JTBC 제공]

창만은 사랑하는 유나를 소매치기 세계에서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순수한 창만이 내심 좋으면서도 불행한 가족사에 갇힌 유나는 창만을 거부한다. 마흔이 되면 소매치기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할 계획인 남수는 유나에 대한 짝사랑을 키워간다. 잇속 밝은 한사장 부부는 박학다식하고 주먹실력을 겸비한 창만을 붙들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작가의 애정이 묻어나는 캐릭터들은 생동감이 넘친다. 남녀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역, 심지어 계팔이 옥상에서 키우는 3마리 개들마저 천연덕스러운 연기력을 보인다. 이희준은 그동안 맡아왔던 바른생활 청년의 연장선상에 있으나 각박한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김옥빈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여성의 암울한 정서와 바지(대상)의 깝지(지갑)를 터는 소매치기의 섬뜩함을 날카롭게 매치한다.

조연진의 활약상은 눈부시다. 영화에서 코믹한 감초 캐릭터를 줄곧 소비해온 이문식은 긴 호흡으로 다양한 얼굴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서울뚝배기’의 껄렁한 안동팔 역 주현과 ‘서울의 달’의 변태 미술선생 백윤식에 버금가는 내공을 터뜨린 정종준이 신의 한수라면, 뮤지컬배우 출신 오나라는 재발견이다.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믹연기와 간드러지는 가창으로 드라마에 윤기를 더한다.

▲ 장노인 역 정종준(위)과 양순 역 오나라(아래)[사진=JTBC 방송화면 캡처]

◆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층위의 시선 ‘감동 증폭’

자칫 칙칙할 법한 인물들과 배경을 상쇄하는 힘은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층위의 시선이다. 시청자의 일상과 유리된 출생의 비밀, 재벌가 이야기, 신데렐라 스토리 대신 현실의 삶을 진지하게 통찰하는 작가의 가치관은 묵직한 힘을 발휘한다.

꼼꼼한 취재에 기초한 디테일과 전문용어가 주는 사실성은 기초생활수급대상자와 비정규직의 애환을, 중장년·노년의 쉼터인 콜라텍 세상을, 조폭과 소매치기 세계를 상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하루를 공친 일용직 노동자 칠복의 “하루가 무너진 게 아니라 인생이 무너진 거 같아요”란 대사는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마음을 움직인다.

이와 함께 작가의 가공할 '구라'에서 나오는 위트와 해학의 대사들은 포복절도케 한다.

▲ 소매치기 현장에서 맞닥뜨린 유나(김옥빈)와 창만(이희준)[사진=JTBC 방송화면 캡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절대 선한 이도, 악한 이도 없다. 때론 소름끼치고 비열하지만 바탕엔 인간미가 흐른다. 무시로 종업원을 협박하고 선배를 구박하는 한만복이지만 툴툴대면서도 선배를 내쫓지 못하며 전처 소실인 딸의 연극 캐스팅 불발에 애간장을 끓인다. 경찰 시절 ‘봉걸레’로 불릴 만큼 비리의 온상이었던 봉달호는 사랑과 연민으로 소매치기를 품었고, 남의 돈을 훔치는 유나와 남의 남자를 훔치는 미선은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이해한다. 작가는 힘주어 ‘사랑’을 말한다. 소외된 이들일수록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짝패’로 김작가와 호흡을 맞췄던 임태우 PD는 군더더기 없이 긴장과 이완을 조율하는 연출력, 아날로그 정서로 감동을 배가한다. 장노인이 등장할 때마다 흐르는 영화 ‘대부’의 주제가를 비롯해 인디가수 윈터플레이의 재즈넘버 ‘함정’과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블루스곡 ‘사랑따위로’ OST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감각적인 젊은 작가군단, 섬세한 필치의 여성작가들이 점령한 드라마 지형도에 파열음을 낸 선 굵은 남성 노작가 김운경의 귀환이 반갑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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